오늘의 이야기는 지난 주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했던 그 이야기 바로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바울은 2장 14절에 게바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여기서 “유대인답게”를 유대인처럼”으로 바꾸면 의미가 더 쉽게 들어올 것이다. 뜻인즉,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식사했던 것은 유대인처럼 행동하지 않은 것인데 그것을 극복했는데 지금 이방인을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고 살라는 것은 무슨 이유냐? 란 것이다. 또는 Jewishness를 초월해서 이방인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다가 왜 갑자기 Jewishness를 이방인에게까지 강요 하려고 하느냐? 란 뜻이다.
바울은 Jewishness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데 확신이 있었다. 지금 와서 다른 사람에게 Jewishness를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바울이 이것에 대해 강하게 말하는 이유는 지금 복음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되면 나중에는 복음의 본질이 바꿔어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할례를 하고, 율법을 지키고, 이런 것들이 나쁜 것이 아니다. 도덕적으로 나쁜 것도 아닌데 바울이 왜 이렇게 강하게 나오는가? 바울은 이런 태도가 예수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았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것을 다룬다.
15절에서 바울은 말한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여기서 “우리”는 게바, 자기 자신, 심지어 갈라디아에 들어온 거짓 선생들도 포함해서 말하고 있다. 유대인 전체를 의미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이라고 하지 않고 유대인과 이방죄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유대인과 이방인이 차이는 유대인은 죄인이 아니고 이방인은 죄인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바로 바울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보편적인 이해였다.
이들의 생각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율법이 있고 그래서 무엇이 죄된 행동인지 아닌지를 알고 있고 또한 죄를 지을 경우 종교의식이 있기 때문에 제사를 통해 죄가 씻어질 수 있기 때문에 죄인의 삶에 매여있지 않다. 그러나 이방인은 율법도 없고 제사도 없기 때문에 그들은 죄인으로 남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 바로 지금 말한 것에 대해, 우리가 너무 당연한 사실이라고 여기는 그것에 대해 반문을 던지려고 이 말을 한 것이다.
16절이 바로 바울의 반문이다. 15절이 맞고 그것이 전부라면 이방인은 모두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16절에 그는 다른 명제를 갖고 나온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보편적인 이해(conventional understanding)를 도전하는 것이었다. 바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며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란 것이다. 즉,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이가 없다란 것이다. 의로움이란 유대인이기 때문에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율법의 행위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얻어지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여기서 이것을 두가지로 볼 수 있다: faith in Christ vs. faith of Christ.
Faith in Christ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말한다. Faith of Christ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끝까지 믿음을 지킨 그리스도의 faithfulness를 말한다.
우리가 믿는 것이 또 하나의 행위처럼 여겨져서는 않된다. 하나님의 은혜이며 이것을 담을 수 있는 유일한 그릇은 오직 믿음이다. 믿음은 열린 마음이다. 어떤 환경에서든지 하나님만 바라보는 마음. 하나님만 의지하는 마음.
의롭다함: dikaiosyne came from dikaioo (to make righteous)
바울은 이것을 법정 용어나 도덕적인 용어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 심지어 유대인의 종교의식 용어로도 사용치 않고 있다.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잘못 나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올바르게 잡으셨다. 하나님을 떠나 멀리 멀리 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셨다.
성 어거스틴이나 마르틴 루터는 이 구절을 보면서 큰 깨달음을 가졌다. 그들은 자기 속의 갈등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의인이 될 수 없다는 자신의 무능력함 때문에 깊은 고민을 했다. 그런 갈등 가운데 그들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경험이 놀라운 경험이었으나 바울의 이루고자 하는 목적과는 다랐다. 바울은 지금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보내고 있다. 지금 바울이 다루고자 하는 이슈는 개인적인 갈등이 아니라,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율법과 할례를 강요하는 이슈다. 개인적인 도덕적 갈등에서 이 이야기가 나온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루터나 어거스틴이 말하는 것이 틀렸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인 도덕적 갈등에 이 구절이 사용될 수 없다는 것도 아니다.
단, 바울의 이슈는 개인적인 이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의 이방인들이 유대인의 규례를 지켜야 하는가에서 나온 것이다. 유대인은 의인이고 이방인은 죄인이라는 생각을 바울은 무너뜨렸다. 거기서 시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금가버린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달려있지 않다.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하였고 하는 그 모든 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란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주셨다는 그것을 믿음으로 올바른 관계가 시작된다.
초점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있다. 구원은 나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떠나는 순간 우리는 다시 매이게 된다. 구원의 이유를 나에게로 돌리는 그 순간 그리스도의 죽음은 헛된 것이 되는 것이다. 21절,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페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리나.”
그렇다면 구원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나” 이다.
유대인이라고 하는 것은 집단적 자아정체성 (collective self-identity)에 불과하다. 그러나 결국은 “나”를 정의한다.
“내”가 율법을 지키고,
“내”가 할례를 받고.
거짓 선생들이 들어와 갈라디인들에게 한 것은 다시 “나”에게로 초점을 돌렸던 것이다.
나에게서 십자가로 눈이 돌려졌는데 다시 십자가에서 나로 눈이 돌아갔다. 그러니 십자가는 헛된 것이 된 것이다.
바울은 20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다시 설명하고 있다. “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이다. 그러니 이젠 내 안에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나의 존재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계신 것이다. 문제는 이 “나”는 기회만 있으면 다시 기어나온다란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너 자신을 부인하고 …(눅9:23). 내가 뭘해서 구원을 이루겠다가 잘못되었다. 구원은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기 중심의 세계에 꼭 필요한 말씀이다. 예수님을 향한 사단의 시험도 예수님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도록 만들려는 것이였다. “내”가 중심이 되는한 구원은 가능치 않다.
(20절) 우리가 육체 속에 살지만 우리의 의식은 나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영적 여정이다.
우리는 유대인의 율법처럼 매우 세련된 율법이 없을지라도 우리가 추구하는 법이 있다.
그것을 이루면 의를 이룬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으나 신앙인의 여정은 방향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다. 점점 내가 보이지 않는 그런 여정. 나를 감추려고 해서가 아니라 내 속에 그리스도가 더 크게 자리잡고 그분이 나타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