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공부에서 구원의 과정에 있어서 가장 문제되는 것이 “나”라고 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하였다. 구원은 나로 인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나 임에도 불구하고 일어난 사건이다. 구원은 “나”를 살리려고 하는 노력이라기 보다는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과정이다.
대부분의 인간의 노력은 붙잡지 못하는 나를 붙잡고, 비워져가는 나를 무언가로 채우려는 노력하는 것인데 바울사도는 오히려 나를 버리는 것이 구원을 이루는 지름길이라고 한다. 그것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표현하였고 예수님은 “네가 나를 따르려면 네 자신을 부인하고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여러분 가운데 내가 없어진 구원이 과연 구원인가?란 질문을 할 수도 있다. 내가 죽어버린 구원이 무슨 구원인가?
여기서 “나”라고 하는 것은 나의 존재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나”가 아니라 껍데기의 나를 의미한다. 생명을 살아가는 “나”가 아니라 목숨을 지탱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나”이다. 남과 더불어 같이 존재하는 “나”가 아니라 남과 경쟁하여 남의 위에 서려고 하는 “나”. 우리의 “나”가 아니라 나만의 세계의 “나”이며 곧 껍데기의 나를 뜻한다.
내가 구원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이 껍데기의 “나”가 그 과정을 take over 한다. 겉으로 율법을 잘 지키고 의로운 사람처럼 행동을 하지만 그것은 그저 눈에 보이는 겉사람의 모습일 뿐이다. 바울은 속사람과 겉사람을 나누고 속 사람이 강건해지는 것을 기도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속사람을 보신다란것을 의미한다.
오늘의 본문인 3장 1-9절을 보면, 바울은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로 시작한다. 여기서 어리석다는 것은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뜻도 아니고 머리가 나쁘다는 것도 아니고 무식하다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어리석다고 하는 것은 눈이 멀었다는 뜻이다. 보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눈에 무엇이 씌여서 보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무언가에 꾀임을 당하여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켜 말한다 (1절 마지막에 “누가 너희를 꾀더냐”)
여기서 갈라디아 교회의 상태를 볼 수 있다. 누군가가 그들에게 마치 마술을 걸어 그들의 눈에 뭔가가 씌여 볼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즉, 그들은 눈에 뭔가 씌여 보지 못하는 상태가 된것을 뜻한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바울의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모습과도 같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고 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떨어졌다. 자기도 뭔가에 씌여서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했다. 눈을 멀게 하는 것, 이것은 바로 “껍데기의 나”라고 생각한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처음 복음을 바울로부터 받았을때 껍데기의 나는 그들의 의식속에도 없었다. 그들은 진정으로 그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 그것에 감사하며 복음을 받았다. 이방인인 자기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헤를 마음속 깊이 받아들였고, 자기도 하나님의 자녀,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많은 성령의 놀라운 역사들을 경험하였다. 5절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라고 바울이 말한것을 보면 그들이 성령을 받았고 능력을 경험했었다 라는 것을 알수 있다.
그들은 하루 하루를 감격속에 감사함으로 삶을 살았다. 서로 존경하며, 서로에 대해 기뻐하며, 서로 인정하고 세워주며, 같이 신앙의 여정을 걸어갔다. 누가 더 훌륭하고, 누가 더 잘 났고, 누가 더 열심이고 하는 그런 의식 없이 각자 나름대로 있는 그 자리에서부터 의미있는 영적 여정을 걸어왔다. 서로의 독특함을 인정하고,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의 사역을 존중하며, 자기 자신을 대단히 여기지는 않지만 귀하게 여기며 신앙생활을 잘 해왔다.
그런데 갑자기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 마치 권위있는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성경도 잘 알고, 전통에 대해서도 잘 알며, 열심도 있고, 능력도 있는 그런 사람들이 갑자기 너희들이 하고 있는 것들이 다 잘못되었다 라고 하며 그들을 지식과 권위로 짓누르고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는 행동 강경을 주며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이라고 흔들어 놓았다. 그들이 한것은 갈라디아 교인들 안에 잠자고 있었던 껍데기 “나”를 깨우고 흔들어 놓았다.
인간은 껍데기 자신에 대해 약하다. 눈에 보이는 어떤 모습이 가장 중요하다. 율법을 지키며 할례를 받고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들이다.
그때까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께 감사하며 서로 존중하며 살던 공동체가 갑자기 뭔가 잘못하고 있고 뭔가를 해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분위기, 즉 다시 자신의 껍데기 “나”를 세우는 모습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 분위기가 바로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더 중요치 않게 되고 (보이지 않게 되었고), 자기가 무엇을 하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바울이 떠난 후에 그들의 내적인 영적 여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원인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점점 그들은 외적인 면에 치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의 눈은 가리워졌다. 십자가를 보지 못했다. 고린도전도1:22절 말씀이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처음에 복음을 받았을 때에는 은혜의 능력과 지혜가 있었으나 이제는 어리석은 이방인의 모습과 같이 되어 버렸다. 아니, 십자가를 어리석은 것으로 여기게 되어 버렸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이냐? 여기서 율법의 행위라고 하는 것은 거짓 선생들이 주장한 얘기다. 2-5절까지는 성령을 받은 것에 대한 얘기다.
거짓 교사들도 예수를 믿는자들이였기 때문에 성령이 임한 것을 믿는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을 받기 위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노력이 없이 성령은 임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또한 자기들처럼 성령의 기적적인 힘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매우 받아드리기 좋은 argument다. 아무것도 무료가 아니다 라는 것이다. 뭔가는 선한 일을 하여야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신다 라고 주장했다. 율법을 더 잘 지키면 더 많은 성령을 주신다 라는 것이다. 영적인 계급을 만드는 행위가 된다.
바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라고 말한다 (5절).
들음 => akoe pisteos
- 듣고 + 믿음 => 두 명사의 합성어다
- 듣는 행위 혹은 들려진 것을 뜻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들음은 믿음을 가져오는 힘을 뜻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
들음이 믿음의 눈을 열게 하고, 믿음을 자극하고 일깨운다.
성령의 역사는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부터 시작되어 듣고 깨달음까지 이어진다.
바울은 다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질문을 던진다,“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3절). 여기서 “육체”는 살을 벗기는 것을 의미한다.
더불어 바울은 아브라함을 언급하며 묻는다: 누가 진정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냐?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은 바울은 모세로 가지 않고 아브라함으로 간다.
왜 그랬는가?
(1)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백성의 시초이기에
a. 그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이룬다.
(2)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할례가 왔다.
(3) 아브라함은 율법이 있기 전의 사람이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의 가장 중요한 포이트는 아브라함이 복음을 받았다 라는 사실이다. 들음과 믿음의 역사가 아브라함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라는 것이다.
복음의 선포가 있었을때 믿음의 역사또한 이뤄지는 것이다.
복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 라는 것이다.
어떻게 복을 받는가? 감춰졌던 것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나타남으로 말미암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