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두번째로 올라간 것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먼저 바울은 14년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고 말한다. 여기서 14년후가 언제부터 계산해서 14년인지는 확실치 않다. 처음 올라온 후로 14년이 지났는지, 바울이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지 14년이 지났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것을 다루지는 않겠다. 하여간 14년이란 긴 시간이 흘렀다.
바울이 처음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와는 상황이 많이 변했다고 생각이 든다. 처음에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갔던 것은 게바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또한 바울은 홀로 올라갔다. 처음부터 바울은 누구에게도 복음에 대한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는것으로 보아 그의 첫번째 여정은 자신을 소개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자기 홀로 올라갔던 것이 아니고, 바나바와 디도와 함께 갔다. 바나바는 바울을 안디옥 크리스챤들에게 소개했던 사람이다. 바나바는 바울 이전에 벌써 교회의 리더의 역할을 맡아왔던 사람이다. 그후 바나바는 바울과 함께 선교여행도 떠났었고 함께 안디옥 교회를 섬겼었다.
바나바와 함께 왔다란 것은 대표성을 갖고 왔다는 것이다. 오늘 바울이 애기하는 내용을 보면 그 이슈가 드러난다. 어떤 이슈인가? 할례, 할례자, 무할례자 라는 말로 사역을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슈는 할례의 이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디도라고 하는 헬라인이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갔는데, 그의 할례 문제로 어려움이 있었던 것을 보게 된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던 어떤 사람들을 “거짓 형제”들이라고 칭하며 그들이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를 강요했다라고 한다. 이들이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그들 역시 유대교의 전통을 유지하려는 갈라디아에 들어온 거짓 선생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이들이 가만히 들어왔다고 말한다. 가만히 들어왔다는 것은 대표성이 없이 자기 맘대로 행동하는 그들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지시를 받은 것도 아니고, 그들이 보낸 사람들도 아니고, 그들을 대표하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자기들 마음대로 바울 일행에게 디도의 할례를 강요했던 것이다.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들이 이들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거짓 형제들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했던 행동을 해석하는 구절은 바로 4절,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이다. 그들이 아직도 율법에 매여있는 모습을 바울은 지적하고 있다. 나중에 바울은 그 율법에 묶여있는 것에 대해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얻음이 없이 아직도 율법에 매여 두려움에 살아가는 자기들이 그 두려움을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키려고 하는 것을 바울은 보았던 것이다. 그런 바울은 넘어가지도 흔들리지도 않았다,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5절). 바울이 자유와 종에 대해 말하는데 이것에 대해선 바울이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오늘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바울이 할례의 문제를 다루려고 예루살렘에 올라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왜 이 문제를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다뤄야 했다고 생각하는가?
바울은 누구에게도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지 않았다. 바울은 어떤 누구보다도 더 복음에 대해 확실한 깨달음이 있었다. 처음부터 복음이 확실히 정립된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의 많은 부분이 바로 바울이 정립한 복음이다. 물론, 그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실상은 예수님부터가 아니라, 만세 전부터 감추어져 있던 복음이다. 6절에 그것이 잘 표현되어 있다,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이 뜻은 그들이 바울의 사역이나 바울 개인에게 더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약간 교만한 말처럼 들리나, 바울은 사실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이제까지 그들의 도움을 받고 사역을 하지 않았다. 지금 이때 바울이 구제헌금을 얻으러 이방인 교회에 다녔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나중에라도 바울은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일을 했다.
그렇다면,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거기에 있는 사도들을 만나기 원했던 이유는 무엇때문이었는가? 바로 계시때문이었다. 2절에 “계시를 따라 올라가”라고 나와 있다. 또 다시 apocalypse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바울에게는 이 사건이 그렇게 중요했다란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저 문제가 있어서 올라간 것도 아니고, 예루살렘 교회가 불러서 올라간 것도 아니고, 자기가 스스로 생각해서 올라간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사건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복음의 사역은 이 놀라운 계시의 사건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복음이 바울에게 보여진 것도 그렇고, 바울이 예수님을 처음 만난 것도 그렇고, 복음의 사역이 이루어지는 것도 바로 이 계시의 사건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인간의 전통이나, 관습에 의해 진행되는 종교성은 이것을 수용하지 못한다. 이것이 믿음의 현실이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던 것과 같다. 거듭난 삶의 모습은 마치 바람과 같다고 하셨다. 바람을 움직이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그저 바람이 분다는 것을 알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다. 내가 주장하고, 내가 만들어가고, 내가 시작하는 것 같지만, 우리의 인생의 바람을 부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그러니 바울에게, 예루살렘 사도다, 기둥이다, 유력하다, 이런 것들은 바울에게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생각일 뿐이고, 인간이 만들어놓은 조직일 뿐이고, 명성일 뿐이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율법으로 그 바람을 시작할 수 없다란 것이다 . 온전히 하나님께서 하시는 그 움직임에 우리는 그저 동참할 뿐이다. 인간이 이 복음의 가는 방향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바울은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서 또한 그는 자유함을 경험했던 것이다.
바울은 인생의 신비로운 면을 잘 본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의 인생은 잘 갖추어져 있었던 삶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신비함과 자유함은 경험하지 못했다. 복음의 능력은 지금도 계시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찾아온다. 계시라고 하는 것은 한번 보여지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계속해서 우리에게 계시의 역사는 일어난다. 거기서 깨달음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 깨달음이 바로 변화를 만드는 것이고, 변화라는 것은 문이 열어지는 것이고 새로운 기회와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계시의 사건이었기 때문에, 거짓 형제들이 아무리 훼방을 놓으려고 하여도 훼방을 놓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흔들리지 않았다. 디도를 데리고 오지 않는 것이 평탄한 미팅을 하는데 도움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디도가 바로 바울이 다뤄야할 이슈의 실제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디도에게 할례를 주지않고 데리고 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계시의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 결과를 보면 7절에 그것이 나온다,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또한 9절에,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계시의 역사이다. 계시가 있으니 깨달음이 있었던 것이며, 깨달음이 있으니 변화가 있었다.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은 공식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바울의 사역을 받아드렸다. 바울은 이방인을 위해 특별히 부름을 받은 사도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이 자기의 설득력 때문이 아닌 계시의 능력으로 보았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이렇게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이것으로 인하여 교회가 둘로 나눠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계시를 주셔서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하셨고, 또한 계시의 능력으로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깨달음을 주셨고, 그럼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하나되게 하셨다. 실상, 이 결정은 예루살렘 사도들에게는 상당히 크고, 획기적인 결정이었다. 복음이 유대교의 틀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고, 복음을 유대교의 틀 속에 가두어둘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들의 생각은 문화를 초월할 수 있었다.
이렇듯, 우리는 우리의 작은 틀에서 늘 벗어나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인생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길 원하신다. (예. People Inside 인터뷰에 나온 김수영씨)
복음의 세계는 무궁무진한 세계이다. 닫힌 세계가 아니다. 열린 세계이다. 정지해 있는 세계가 아니다. 역동적인 세계이다. 죽은 세계가 아니다. 살아 움직이는 세계이다.
복음의 세계는 우리를 늘 도전한다. 앞으로 나가라고 도전한다. 두려워서 발을 떼지 못할 때, 우리를 밀어 넣는다. 바울이 본 세계가 바로 그런 세계였다. 바울이 겸험한 계시가 바로 그런 계시였다.
우리 또한 꿈을 버려서는 안된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핍박을 받았지만 결국은 그들이 이 복음을 받아들일 것을 알았다. 오늘,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복음의 삶을 산다는 것이 쉽지 않다. 예루살렘에서 그 결정을 하였는데, 그 결정이 있은 후로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었다. 안디옥에 있는 헬라인 크리스챤들은 너무나 기뻤고 영광스럽게 여겼다. 그들은 늘 자신들이 second class citizen 이라는 생각속에 살아 왔었다. 그런 그들에게 베드로가 와서 함께 먹고 잘 지냈던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야고보에게서 온 할례자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 슬쩍 헬라인들과 함께 했던 그 자리를 피했다. 게바뿐만이 아니라 다른 유대인들도 그랬고 바나바도 거기에 동조했다. 이것이 헬라인 크리스챤들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 있었다. 모든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한 몸으로 생각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몸에 밴 것을 뽑아버린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런 것을 보면 바울의 변화가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다. 바울도 유대인이였고 엄격한 바리새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그것들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그런 변화를 바울은 경험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