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의 전통을 지켜야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 때문에 혼란속에 빠져있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13절에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와 “너희가 들었거니와” 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보면 바울은 벌써 자기의 과거를 갈라디아인들에게 말했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이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그가 한 일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며 잔해한 것을 의미한다. 바울의 다른 서신이나 누가의 사도행전 기록을 보면 사울의 핍박은 매우 심했다고 볼 수 있다. 감옥에 가두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죽이는 일까지 있었던 것 같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도 하나님에 대해 열심히 있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열심이 있어도 소용이 없다 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올바른 결론인가?
그렇지 않다. 바울이 열심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바울의 열심은 예수를 만난 후에도 바뀌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보면 그는 더욱 더 열심히 주님을 섬겼다. 그는 자기가 모든 사도들보다 더 열심히 주님을 섬겼다고 고백하고 있다.
인생을 열심히 사는 것, 존경받을 만한 quality라고 생각한다. 대충 대충, 적당히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바울은 예수를 믿기 전에도 그렇게 살지 않았고 예수를 믿은 후에도 그렇게 살지 않았다. 예수님도 열심히 사셨다. 자유, 깨달음, 은혜를 강조한다고 해서 열심히 섬기지 않아도 된다라고 생각하는것은 잘못 받아들인 것이다.
바울의 문제는 그의 열심이 아니라 뭘 모르고 열심히 살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말하기 위해 바울은 15절에 “그러나”로 시작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포인트이다.
예수에 대한 깨달음 전의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표현한다. (갈 1:14)
(1) 내가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2)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예수에 대한 깨달음을 갖게 된 후의 그는 자신과 자신의 삶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갈 1:15-16절)
(1)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2)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3)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4)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깨달음 전 바울의 삶의 주어는 “나” 였고 목적어는 “유대교와 유전”이었다. 깨달음 후의 바울의 삶의 주어는 “하나님”이 되었고 목적어는 “나”가 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유대교를 향한 열심이 그를 15-16절에 나오는 은혜의 삶으로 연결시키지 못했다란 사실이다. 오히려 그의 열심히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며 잔해하는 결과를 이르켰다.
(17-24절)
왜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지 않은 것과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한 것을 강조하고 있는가? 16절에 그 아들(예수님)을 이방에 전하기 위해 그를 자기 속에 나타내셨다고 바울이 말한다. 그리고 바로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고 한다. 예루살렘에 가지 않은 이유는 그에게 나타난 계시된 복음이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 삼년 만에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갔고 15일을 유했다고 한다.
갈라디아에 들어온 거짓 선생들은 바울에 대해서 말하길, 그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복음을 배워 그들의 보냄으로 갈라디아에 와서 복음을 전하도록 되어있는데 바울이 자기 맘대로 예루살렘 교회의 가르침과 다른 복음을 전했다고 그들은 갈라디아 교회에 말했다. 그들의 주장은 바울이 잘못 가르친 것을 교정하기 위해 자신들이 내려왔다 란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처음부터 변화를 받은 후 예루살렘에 가지 않았고 공식적으로 사도들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을 배운 적도 없다란 것이다.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나 사도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며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거짓 선생들의 거짓됨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이것이 밝혀지는 것이 중요한 것은 이것이 (바울이 처음부터 예루살렘에 가지 않았다란 사실이) 거짓 선생들이 주장하는 모든 논쟁의 첫단추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모교회의 권위를 무시하고 그들이 지시한 복음이 아닌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잘못된 인식으로 시작하여, 바울은 교회를 무시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반항적인 리더로 도색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편견은 무섭다. 사람이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보면 그 다음에는 상대방의 모든 행동와 말이 그렇게 보인다. 생각의 훈련에 있어서 가장 어렵지만 반드시 겪어야 할 과정이 바로 이 편견을 없애는 과정이다.
우리 속의 생각이 시야에 영향을 준다. 편견은 시야를 물들게 한다. 바울은 이것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런 편견을 가지고 바울은 평생을 살았고 그 편견으로 교회를 핍박하겠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 결론에 따라 행동을 하였다.
편견 시야 결론 행동
앞부분에서 우리는 big “but” “그러나”(15절)를 살펴 보았다. 바울의 헌신과 열심을 뒤엎는 “but”이었다. 무엇이 깨졌는가? 바로 바울안에 있었던 “편견”이 깨진 것이다. 편견이 깨지니 시야가 열렸고 완전히 다른 결론을 내렸으며 그후 새로운 행동, 즉 복음을 전하는 삶으로 변화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다시 자기가 겪었던 편견으로 빠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우리는 많은 경우 내가 보고 (율법의 눈으로) 내가 결정해서 내가 옳은 것을 지킨다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나”는 완전히 타락한 존재다. 그러므로 율법을 보는 눈이 삐뚤어졌으며 옳은 것을 알면서도 지킬 힘이 없다. 바울은 이것을 본 것이다. 옳고 그른 것을 보여줌으로 변화가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바울이 변화를 받았을때 예루살렘 교회의 신학은 온전히 정리되지 않았다고 본다. 아직도 유대교와 예수님의 가르침의 차이에 대해 온전한 이해가 없었다고 본다. 아직도 유대교 중심의 사상이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할례받는 것과 율법을 지키는 것에 대해 큰 문제를 삼고 있지 않았고 아직도 이방인들과 같이 섞이는 것이 편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속에서 예수 그리스도, 구원, 믿음, 율법의 역활, 이런 것들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도 다 바울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바울의 깨달음은 예루살렘 사도들의 깨달음보다 더 앞서가고 있었다는 것을 불 수 있다. 18절에 삼년만에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바울이 게바에게 가르침을 얻기 위함이 아닌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며 주어진 계시를 베드로와 나누었다고 본다. 교회의 리더십에서는 베드로가 월등히 앞서가고 있었고 영향력이 많았지만 생각 면에서는 바울이 다른 어떤 사도들보다 더 확실히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고 본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반석이었고 그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기초였다. 그러나 바울은 그 기초위에 내용을 채워준 사람이다.
사람마다 다 개성이 있고 달란트가 다르고 쓰임받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본다. 바울과 베드로는 개인적으로 친한 친구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서로 다른 길을 가면서도 같은 길을 갔다. 바울은 이방인 사도로, 베드로는 유대인 사도로, 둘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각자 맡겨진 사역을 감당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살펴봐야 할 것은 15-16절의 의미다. 바울은 말한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이것은 우리의 존재의 깊은 뿌리를 말해주고 있다. 어쩌다보니 태어난 것도 아니고 유대교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당연히 선택된 백성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태어난데는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태어났다란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탄생을 noble하다란 것을 말하는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부르심을 볼때 그 부르심의 깊이가 너무나 커서 그저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우리의 인생을 깊이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본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이 그저 아무런 관계나 연관이 없이 우연히 일어난 일들 같지만 그 점들을 다 연결해보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과 연결이 되어있다는 것을 보게된다.
바울은 이 깨달음을 고민과 고민끝에 발견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어떤 고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율법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누리며 살았다고 한번도 고백한 적이 없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강권적이고 일방적인 나타남, 즉 계시였던 것이다.
그러니 변화라고 하는 것이 참 신기한다. 어떻게 보면 아주 어려운 것이고 또 어떻게 보면 아주 쉬운 것이다. 그 이유가 변화의 주체는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추구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두려움이 확신으로 변화게 되는 것은 복음을 듣고 깨달음이 왔을때 그 확신이 서게 된것이다. 복음이 계시로 나타났을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복음 계시 깨달음(확신) 변화
바울이 처음 갈라디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이런 깨달음의 사건이 있었다. 그들은 기쁨으로 복음을 받아드리고 복음의 힘으로 그들에게는 새로운 인생의 확신이 섰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그들에게 거짓선생들이 이것을 해야 한다, 저것을 해야 한다 하니 다 넘어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