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29일
성경: 에베소서 5:1-2
설교: 하나님을 본 받는자
바울사도는 오늘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본 받으라고 하는 것은 그저 흉내 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창세기 기자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27)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라고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같이 묵상해 보십시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잘 보여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셨던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가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골로새서 1:15)
예수님은 많은 것을 하셨습니다. 기적을 행하셨고, 병든 자들을 고치셨고, 귀신을 쫓아내셨고, 우리에게 귀한 삶의 교훈을 주셨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고,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직 한가지 만을 오늘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읽은 본문의 뒷부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에베소서 5:2)
그는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희생을 지적하여 주셨습니다. 그 그리스도의 희생 속에서 바울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습니다. 그 찌그러진 얼굴 속에서, 상처 받고, 찢어진 그의 몸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새로운 형상을 발견했습니다. 무너질 수 없는 강한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무너진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이전에 갖고 있었던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었고, 어떤 사람도 그 시대에 사는 사람으로써 그런 이미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들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형상은 강한 하나님, 자기의 요구를 듣지 않았을 때, 언제든지 처벌할 수 있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의 형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바울은 새로운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발견한 이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 그를 완전히 변화시켰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강했었습니다. 성격도 강했고, 강한 자기 주장이 있었고, 열심도 강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강한 자기의 모습이 오히려 자기에게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강한
자기의 모습이 자기의 눈을 멀게 하였고, 자기를 묶어 두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바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졌다고 누가는 기록하였는데, 그 비늘이 바로 바울의 눈을 가리웠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비늘이 바로 자기의 강한 모습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바울은 자기의 강한 모습이 오히려 자기를 연약하게 만들었다는 놀라운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맞습니다. 우리의 강한 모습이 오히려 우리를 아주 연약하게 만듭니다.그런데 인간이 자꾸 더 강해지려고 하는 이유는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 강함이 도리어 다른 사람들에게뿐만 아니라, 자기에게도 해가 되고, Abuse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며 계속해서 강해지려고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반대의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하신 분이 연약한 십자가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십자가에
힘 없이 돌아가시는 연약한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저는 그것이 진정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몰랐었습니다. 진정한 힘의 아름다움을 몰랐었습니다. 자기의 강함 뒤에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 숨겨져 있는 것을 그는 몰랐었습니다. 결국, 그의 강함이 폭력으로, Abuse로 나타납니다.
그런 바울의 모습을 누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도행전 9:1, 2)
폭력적인 바울을 봅니다.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도 그것이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도행전 9:4)
왜 나에게 그런 폭력을 행하느냐?
누가에 의할 것 같으면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세번 자기가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만난 것을 간증합니다. 마지막 간증에서는 처음에 나오지 않는 내용이 나오는데 보십시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사도행전 26:14)
너는 나와 나의 백성들을 아프게 할 뿐만 아니라, 네 자신을 아프게 한다. 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라고 주님께서 바울에게 말하였습니다. 그의 강함 때문에 오히려 그는 고생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의 강함이 그를 묶어두었고, 그는 그것 때문에 스스로 고생 하였습니다.
진정한 강함은 그렇게 역사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힘은 우리를 미움으로부터, 적대심으로부터, 술수와
조정하려고 하는 마음으로부터, 심지어 거짓된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케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 자유함을 가질 때, 우리는 거짓된 자아를 가지고 살 필요가 없습니다. 진정한 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고, 자신감을 줍니다. 이런 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힘입니다.
그것이 바울사도가 그리스도를 만나고 경험한 강함이었습니다. 그의
고백을 한번 들어 보십시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린도후서 12:9, 10)
이런 힘이 내 속에 있을 때, 우리는 비로서 자기를 부인할 수 있고, 심지어 자기를 비울 수 있습니다. 자기를 비운다는 말은 자기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거짓된 자기를 세우려고 살아갈 필요도 없고, 두려움에 벌벌 떨며 살 필요도 없이, 온전한 자유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강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약해질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괴로울 것입니다. 바울처럼 가시채를 뒷발질 하는 것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아픔을 안고 살게 될 것입니다. 덕이 되는 삶을 살지 못할 것입니다. 늘 자기 방어, 자기 중심, 자기에 매여 사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내가 죽고, 오히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 때, 우리는 진정한 자기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자아는 나 자신을 해방시킬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해방시키게 됩니다. 그때야 비로서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렸던 주님의 사랑을 본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 사도가 오늘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에베소서 5:2)
오늘 우리는 창립주일을 맞아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깨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 인간에게 그 존엄성과 귀함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이고, 하나님을 본 받는 자,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더이상 자기의 강함으로 일어나는 Abuse가 사라지고, 서로 화해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품어주며, 서로 존중하고, 각자의 모습 속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귀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교회가 할 일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