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2024년 3월 10일)
요한복음 3장 14-21절
"빛으로 나오라!"
요한복음에서는 “믿는다” 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믿는다” 라고 말할 때에 “믿음”이라는 명사로 말하지 않고, “믿는다” 라는 동사로 말한 것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가져라 라고 하지 않고, 그저 믿는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복음서들을 비교해 볼 때에, 그 차이를 더욱 알 수 있게
됩니다. 도표를 보시기 바랍니다.
헬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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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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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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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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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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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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πιστεύ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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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다 (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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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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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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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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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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πίστι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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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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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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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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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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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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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다” 라는 동사가 요한복음에는 98번 나오고 있으며 반면에 “믿음”이라는 명사는 한 번도 나오고
있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에서는요, 믿음이 무슨 개념이나 이론에
관한 것이 아니라, 또는 지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신뢰하고 믿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저기 밖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존재하고 살아내야
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차이들을 볼 때에, 왜 이리도 요한복음에서는 “믿는다”를 강조했을까 더욱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질문을 하면서, 오늘 본문을 보니까, “믿을 때에 영생을 얻게 된다” 라는 표현이 두 번 연거푸 나오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14절로 16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4-16)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두 번 강조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전체에서는 “믿을 때에 영생을 얻는다”라는 표현이 열 일곱 번 나오는데 그 중에 열다섯 번은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이것 또한 믿는다 라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을 믿는다 라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라는 것인데, 실상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적었다 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으라” 라는 말을 수 없이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되었을까 라는 또 다른 질문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중에 16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슬라이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 구절을 가지고,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말했습니다. 복음을 한 마디로 정리해 놓았다고 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살리시는 복음의 핵심이 이 한
구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지를 못하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믿기지 않아서 믿지를 못하는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공짜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에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스스로가 억척스럽게 모든 것을 이루어 낸 사람일수록, 복음에 대한 반감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마치, 나는 이렇게
고생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하면서, 신앙에 있어서도 동일한 잣대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복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편치 않은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공짜만 좋아하는 게으르고 나약한 사람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구원과 영생에 대해서도,
본인 스스로가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에,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 또다른 이유는, 십자가에 대해서 거부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라는 것이, 형벌의 상징이었고,
저주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라고 판단한 것은 그래도 약과인 셈입니다. 십자가가 상징하고 주는 메시지는, 다분히,
어둡고, 절망적이기 때문에, 복음을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 안에는,
복음을 실상 믿지 못하면서도, 종교 생활을 해 나가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믿지 못하면서도, 믿는 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구원에 대해서도, 그 어떠한 기대나 가치를 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죽음 뒤에 삶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자신의 삶을 아는대로,
해 온대로 살아가려고 할 뿐입니다.
지극히 현실주의자가 되어서, 이 땅에서의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삶에만 집중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삶이 바로 18절에서 말하고 있는 삶이 아닙니까?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3:18)
이미 심판을 받은 삶이라는 말입니다. 죽은 뒤에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의 삶에는, 구원, 자유, 소망, 헌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맘대로, 내 뜻대로 살아가려는 욕망 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믿는 자들은, 동일하게 벌써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죽은 뒤의 구원, 죽은 후에의 영생이 아니라,
현재의 삶 속에 영생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도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믿는 순간,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아멘!
복음은 이처럼, 우리를 살려내고,
자유케 하며, 사랑의 사람들로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며,
사랑의 빚진 자로서 살아가게 합니다. 영생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복음을 그리고 이 사랑을 받드시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살
길은 이 복음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밥상을 다 차려 주셨는데, 그리고 잔치를 베풀어 주셨는데, 무슨 이유로,
무엇이 부족하다고, 그 밥상을 걷어 차려고 합니까?
요한복음에서는, 믿는다 라는 것은, 보는 것과 아는 것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Believing, Seeing and Knowing 이 세가지는 그래서 때로는 상호 교환해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에 나오는 이 말씀을 인용했는데요, 여기서 “믿는다”
라는 것에 대해서 알게 합니다.
믿는다 라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무슨 자격증이 있어야 하거나, 무슨 조건들이
준비되어 있어야 필요도 없습니다. 매우 단순한 것입니다. 놋뱀이 장대에 달린 것을 바라보는 자들은 목숨을 구했듯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어두움에 있는 나의 현실에서 빛이신 주님께로 눈을 돌려 바라보는 것이면 충분합니다. 과연 살 수 있을까 라는 의혹이 있어도 괜찮습니다. 이것 또한 믿음의 일부분입니다.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겨지씨 만한 믿음도 기뻐하시며, 축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말이 안 되지만 예수님께 외쳤던 어떤 아이의 아버지의 믿음이면 충분합니다.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막 9:24)
오늘 그 유명한 16절 말씀은 17절 말씀 없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17)
16절 말씀은 믿는 자, 믿지 않는 자를 구분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이 작든, 크든, 어둠에 있든, 내 혼자 모든 것을 하려고 하든, 나는 자격이 없다 하든,
온 세상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십자가는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 앞에, 그리고 이 놀라운 진리 앞에서, 여러분들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모하는 마음이 뜨겁게 일어나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어두움을 보면서,
왜 어두움이냐고 나무라고 정죄하지 않으시고, 빛을 비춰 주시고, 빛으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눈을 들어 빛을 바라보고, 어둠에서 나와 빛으로 나아갑시다. 그것이 니고데모가 한 일입니다. 주님의 빛이, 우리를 정결하게 하고, 새롭게 하며,
자유케 하고 풍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사랑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어느 시대보다, 모든 것을 구원하고 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 복음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거듭나서, 증인이 되는
삶을 살아가십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서 이 세상 가운데 흘러 넘치길 바랍니다. 인종과, 종교와, 신조와 사상을 모두 품는 그 사랑으로, 서로를 대할 때에,
하나님만이 영광 받으실 줄로 믿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그 사랑이 우리 모두를 구원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