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3일
성경: 요한복음 2:13-22
설교: 예배 – 삶의 가장 큰 기쁨
예수님께서 성전에 오셨을 때 그 광경을 보고 매우 슬퍼하셨습니다. 아니 슬퍼했다라기보다는 예수님은 매우 화가 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복음서에서는 그렇게 많이 보지 못하죠.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자비를 베푸시는 예수님이신데, 오늘 본문에 나오신 예수님은 매우 화가 나신, 거의 폭력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을 보면서 제 생각에는 이것이 예수님에게는 매우 중요했구나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와 보시니까 성전에 예배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습니다. 예배한다고 모이긴 모였지만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돈을 예배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요한복음 2:16)
성전은 예배의 장소지 마켓플레이스가 아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지 장사를 하는 곳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굉장히 이게 중요했기 때문에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비둘기 파는 것 자체를 비난하신 건 아닙니다. 소와 양을 파는 것을 비난한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재물을 드리는 것이 예배의 한 부분이었죠. 그래서 예배 오면 항상 재물을 갖고 와서 예배를 드렸는데 재물들이 주로 동물이었습니다. 양, 염소, 비둘기 등등의 짐승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멀리서 성전으로 왔어요. 그냥 그 주위에 온 것이 아니라 성전에 오기 위해서 오랫동안 소를 끌고 양을 끌고 비둘기를 갖고 오기가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들고 오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편리를 봐주기 위해서 성전에서 소도 팔고 양도 팔고 비둘기도 팔았던 것이죠. 그래서 거기에 와서 이 동물들을 사고 번제물로 들였습니다. 그것 자체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보다 비둘기를 파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라고 하는 것이 문제죠.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보신 것이죠. 예수님 늘 마음을 꿰뚤어 보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보고 마음을 꿰뚤어 보셨고, 니고데모를 보시고 마음을 꿰뚤어 보시고. 성전에 와서 그들의 마음을 꿰뚤어 보니까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그들 마음속에는 돈으로 가득 찼어요. 그것이 우상에 빠진 모습입니다. 우상에 빠진 모습으로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죠.
그래서 예수님은 우상에 대해 이런 경고를 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이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24)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성전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재물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돈은 중요합니다. 생존하는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돈 때문에 걱정을 하게 되고, 돈 때문에 우리 속에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 돈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세 가지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돈, 시간, 음식. 이 세 가지가 그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큰 유혹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이 세 가지 것들에 대해서 다룰 수 있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돈에 대해서는 십일조를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은10분의 1을 드립니다. 십일조를 그들에게 가르치면서 돈의 욕심에 빠져 들어가지 마라, 십일조를 행하라고 가르칩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그들은 십일조를 진행하고 있고 그들은 철저하게 돈의 욕심을 벗어버리려고 하는 것이죠.
시간에 대해서는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철저하게 시간도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이 반듯이 있어야 된다 해서 안식일을 통해서 시간에 대한 욕심을 다루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음식에 대해서는 유대인의 음식 규정이 굉장히 까다롭습니다.
이 세 가지 중에 가장 큰 유혹은 돈의 유혹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돈에 대한 유혹을 따로 끄집어내서 경고를 하셨던 것입니다. 돈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할 때 우리의 삶은 망가집니다. 돈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할 때 우리의 예배는 의미가 없어지고 타락하게 됩니다. 그런 마음으로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예배는 행동이 아닙니다. 예배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하나님보다 돈이 더 중요한 마음이 있다면 그 예배는 자기 중심적인 예배가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배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이 산 재물이 되는 것이 예비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나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로마서 12:1)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말은, 온전히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입니다. Complete Surrendering. 그러니까 온전히 항복한다 라는 뜻입니다. 예배는 온전히 항복하는 마음으로 엎드려지는 것입니다. 하나의 앞에 엎드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드린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다라고 하는 뜻도 있습니다. Let go. 내버리라는 것이에요. 모든 것을 let go 해야 합니다.
걱정을 내버리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내버리는 것입니다. 욕심을 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온전히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맘몬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가르쳐 주셨어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하므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 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홥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갖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에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태복음 6:25-32)
하나님께서 다 채워주실 것입니다. 필요한 것을 주실 것입니다. 온전히 신뢰할 때 예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돌봐주실 것입니다. 옷을 주실 것이고. 먹을 양식을 주실 것이고. 살 집을 주실 것이고. 필요한 모든 것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허락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풍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우리를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10:10)
예수님께서 풍성함이라고 하는 것은요, 어떤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풍성해질 것입니다.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삶의 태도가 풍성해질 것이다. 온전히 자족할 수 있다. 어떤 환경에서 내가 자족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이 풍성함입니다.
바울사도가 그것을 경험하셨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이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1-13)
자족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면 풍성함입니다.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항복하고 드릴 때 예배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실상 예배라고 하는 뜻이 그런 거예요. 온전히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입니다. 바울사도가 자신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말씀하신 후에 온전히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게 되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라는 것을 알게 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2)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발견하게 돼요. 감사하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눈이 열려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이 성전정화가 제일 먼저 나옵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 하신 두 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가나의 혼인 잔치와 성전 정화 얘기 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든 것은 기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을 정한 것은 예배를 회복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배가 회복되므로 말미암아 기쁨이 다시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보니까 기쁨이 사라져버리고 예배가 사라져 버렸으니까 예수님께서 오셔서 제일 먼저 하신 것은 물을 포도주로 만들고, 기쁨을 회복하시고, 그 다음에 성전을 정화해서 예배를 회복하시는 것을 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이 땅에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여러분의 예배를 통해서 수많은 축복을 받을 거예요.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에요. 온전히 하나님께 여러분들 자신을 드리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예배를 사모해야 돼요. 예배를 사랑해야 돼요. 초대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살았어요. 예배 드리기 위해서 핍박을 무릅쓰고 고난을 무릅쓰고 위험을 무릅쓰고 예배 드리는 그것을 위해서 그들은 살았다라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배가 살아나면 여러분들이 살아납니다. 예배가 살아나면 나라가 살아납니다. 예배가 살아남으면 우리의 영혼이 살아납니다. 여러분 속에 예배가 회복되는 그런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쁨이 회복되는 그런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온전히 하나님께 믿고 항복하고 드리는 그런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