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복음 vs. 갈라디아에 온 사람들이 전한 다른 복음
성경: 갈라디아서 1장 6-12절
갈라디아서 1장 1절에서 5절까지 우리는 세가지를 보았다.
(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함이었다.
바울의 신학의 중심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것이 있다. 이것을 바울은 고린도전서 더 확실히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려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전서 1:17-18)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우리를 위해 온전히 드리는 하나의 제사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바울에게 제사는 자시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모습이다. 로마서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1)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담당하시고, 온전히 십자가에 자기의 몸을 드린 그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 악한 세대에 붙잡혀 있던 우리들을 건지셨다. 이것은 나의 노력이나 행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을 알리는 소식이 바로 복음이고 이 복음은 인간의 지혜나 생각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계시로 바울에게 임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에게 복음은 계시의 사건이다. 어떤 전통에서 내려온 아이디어가 아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경험했던 것이 바로 하나님의 강권적인 계시였다. 물론, 거기서 모든 것을 다 깨달았던 것은 아니다. 바울이 변하여 눈이 열리니, 복음의 계시가 그에게 밀려온 것이다.
1장 6에서 9절까지 바울은 “다른 복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갈라디아에 들어온 사람들이 갖고온 소위 그들의 복음이었다. 이제 바울은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해 그 복음이 어떻게 바울의 복음과 다른가를 풀어나가고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6절)
여기서 다른 복음은 바울이 전한 복음과 다른 복음을 뜻한다. 갈아디아 사람들은 벌써 바울이 전한 복음을 버리고 갈라디아 교회를 뒤흔들어 놓은 사람들이 전한 복음을 따라가고 있었다. 즉, 그들의 생각이 변해 버렸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랜 세월을 두고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속히”라는 표현을 쓴 것을 보면 바울이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런 일이 일어났던 것같다.
바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처음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진정 기뻐했으며, 놀라운 깨달음을 얻었던 그들이었다. 복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이 이제 어둠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을 깨달았었다. 그래서 바울에게 그들은 감사했었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갈 4:13-14)
바울을 천사처럼 여겼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눈마저 바울을 위해 빼어줄 용의가 있었던 그들이었다. 바울의 육체적 연약함을 알고도 그들은 바울을 극진히 대접했었다.
그런 그들의 마음과 생각이 “속히” 떠나버렸던 것이다. 한때 바울의 메시지를 통해 진정한 깨달음을 가졌던 그들이었으나 곧 그들의 생각이 변해버린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우리의 생각은 늘 빨리 변한다. 깨달음이 왔다가도 다시 곧 세상에 젖어들어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된다. 말씀을 배울 때는 뭔가 깨달음이 있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조금 시간이 지나고 인생의 파도가 밀려오면 우리는 쉽게 넘어진다. 특히, 이방인들에게는 신앙과 말씀의 뿌리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쉽게 일어날 수 있었다고 본다.
바울은 마음이 참 아팠을 것이다. 자기를 천사처럼 대했다가 원수처럼 대하는 것도 마음이 아프지만 그보다 자기가 가르친 것으로부터 그렇게 속히 떠날 수 있다는 것을 보며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자신이 전한 복음이 그들의 영혼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했다라는 사실에 가장 힘들어 했을것이다. 갈라디아서 4장 16절에서 바울은 묻는다: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현실이다. 천사처럼 여기고 눈을 빼줄 정도로 바울을 좋아했던 사람들이 원수가 되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과 생각은 쉽게 변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에 들어와 혼란스럽게 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1)“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6-9)
“요란케” 란 단어가 원래는 두렵게 (frightened)하였다란 의미를 뜻한다. 그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두렵게 하였다는 말이다. 즉, 그들은 그들의 메시지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위협했다. 어떻게?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메시지로 말이다.
(2)“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갈 3: 1-2, 5)
그들의 메시지는 율법을 잘 지키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신다고 강조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이 복음의 핵심이요 기초라고 믿었다. 즉, 그들의 논리는 회개하고 율법을 잘 지키며 살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점이 바로 할례를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가르쳤다.
(3)“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내게 하려 함이라.” (갈 4:17)
그들이 열심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자기들의 말을 듣게하기 위해 열심을 낼 뿐이었다고 바울은 생각했다. 열심히 신앙생활은 했다 그러나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4)“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리라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 (갈 5:7-12)
그들은 할례를 강조했다. 그것이 갈라디아인들을 요동케하고 어지럽게 하였다.
(5)“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2-14)
그들은 갈라디아 교인들로 할례를 받게 하며 그것을 자신들을 자랑하는데 사용하려했다. 그들 자신은 율법도 지키지 않는 자들이였다.
이처럼 바울이 잘 세워놓은 교회를 이들은 아주 혼란스럽게 하고, 바울의 사역을 망가뜨렸다. 이와같이 교회가 말씀에 제대로 서있지 못하고, 어떤 사람의 헌신이나 열심히 하는 것을 보고, 그것에 현혹되면 교회는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갈라디아에 들어온 사람들은 열심이 있었고, 헌신도 있었다. 또한 갈라디아 교인들에겐 그들의 말이 더 알아듣기 쉬웠다.
인간은 종교를 통해서 무엇을 하기 원한다. 우리 인간은 자기의 죄를 덜기를 원하는 강한 열망이 있다. 무엇을 하든 자기의 죄를 덜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그들은 열심히 한다. 할례를 받는 것, 그리고 율법을 열심히 지키려고 하는 것, 이런 눈에 보이는 행동으로 의로워지는 것을 느끼는 것이 휠씬 더 쉽고, 이해하기가 좋다. 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죄용서함을 받았다는 것은 어떤 보이는 것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눈에 보이는 뭔가를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더 선호한다. 예를 들어 교회에 열심히 나오라든지, 십일조를 하라든지, 세례를 받으라든지, 봉사를 하라든지, 헌신적으로 일을 하라든지, 이런 구체적인 것들을 더 좋아한다. 생각할 필요없이 이런 것들을 하면서 구원을 이룰 수 있으면 더 좋아한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것은 우리 내적 변화, 내면에서 일어나는 깨달음, 자유함, 능력, 소망, 이런 것들을 말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겉으로 예기하기가 쉬운 것들이 아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에 들어온 사람들은 우리가 우리의 육체의 정욕을 이길 수 있는 오직 한 길은 율법을 잘 알아서 지킴으로 이길 수 있다고 가르쳣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보아도 그렇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아도 그렇다는 것을 바울은 알았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밖의 측정으로 측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을 이해시키기가 더 어려운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의 역사는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복음을 진정으로 들으면 믿음의 역사가 내면에서 일어나고, 거기서 진정한 변화의 시작이 된다는 것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바울은 10-12절에 자기의 사역은 사람들에게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는 자기가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애기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한다면 우리는 사람의 종이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우리가 기쁘게 하기를 원하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요, 그리스도시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마음, 이것처럼 우리를 붙잡아 두는 것은 없다. 어렸을 때는 부모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하고, 학교에 가면 선생들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하고, 직장에 가면 상사에게 인정받으려고 하고, 교회에 가면 교인들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한다. 이렇게 살다보면 나중에 내가 누구를 위해 삶을 살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갈라디아에 들어온 사람들은 화술에 능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무엇을 듣기를 좋아하는 가를 알았다. 위협을 줄 때는 위협을 주고, 올려줄 때는 올려주면서 그들은 갈라디아인들을 매혹했다. 그들이 죄책감 때문에 원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면서 계속해서 그들을 유대인으로 만드는데 바빴다.
바울은 그들을 유대인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기를 바울은 원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그로 인하여 구원을 얻고, 자유함을 얻는 것이었다고 바울은 믿었다.
우리는 십자가를 믿으며, 십자가는 부활을 가져올 것을 믿는다. 십자가의 사역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사역이라기 보다는 늘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사역이다. 우리는 사역을 하면서 어느 자리가 영광을 독차지하는 자리인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은 내가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도리어 그 자리를 가능한 피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자유함을 얻는 지름길이다.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매이게 된다. 우리의 의를 드러냄으로써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다. 우리는 십자가의 도를 전할 뿐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바울의 복음은 철저하게 십자가의 복음이었다. 그 어디서도 십자가의 복음 (하나님이 죽었다는 것이 복음이 되는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니 바울이 자기의 복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갈 1:12) 인간의 전통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도 생각해낼 수 없는 그런 복음이라는 뜻으로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갈라디아서를 공부하면서 복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에 대해 계속적으로 주제가 나올 것이다. 한꺼번에 그것을 정리하는 것보다는 계속해서 보면서 우리에게 오는 느낌이 있을 것이고,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 십자가의 복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조금씩 정리되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