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4일
성경: 요한복음 21:1-19
설교: 죄책감 속에
숨어있는 소망
죄책감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때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치 못합니다. 때로는 실수를
합니다.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선을
항상 행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경멸하는 악을 행할
때도 있습니다. 항상 올바른
것을 위해 싸우지 않습니다. 잘못된
것과 타협을 할 때가
있습니다. 두려움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 우리가
굳게 믿는 것을 지키려고
하기 보다 도망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 도망쳤습니다. 자기의
친구이고, 스승인 예수가 부당하게 체포를
당했을 때, 그들은 예수를
버렸습니다.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마태복음 26:56)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원칙에
따라 살지 못할 때, 우리는
죄책감을 느낍니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고 또한
올바른 반응입니다. 죄책감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책감을
느끼느냐 느끼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죄책감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죄책감을 잘 보시고
그것을 도와주시려고 나타나신 것을
봅니다.
죄책감은 우리 속에 슬픔을
만들어 냅니다. 또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
무기력한 생각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을 잘 표현한 구절이
바로
3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요한복음 21:3)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딴 곳에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고기를 잡을 마음으로 그물을
던졌던 것이 아닙니다. 슬픈 마음을
달래느라고 그저 고기 잡으러
나간 것입니다.
죄책감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를
슬프게도 하지만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저지른 잘못, 고칠 수가
없습니다. 벌써 엎드러진 물입니다. 줏어 담을
수가 없습니다.
죄책감을 느껴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바뀌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죄책감에
대한 새로운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소망을 볼 수 있습니다.
David Prusha라고 하는 심리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Our
guilt hides hope within it.
우리의 죄책감은 그 속에 소망을 숨겨두고 있다.
참 흥미로운 통찰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소망이 죄책감
속에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죄책감이라고 하는
것이 쓸데 없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저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저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매우 슬프고 우울한
장면을 그리고 있지만 그 속에
뭔가 소망이 싹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죄책감의 새로운
깨달음,
새로운 dimension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책감을 사용하여 놀라운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죄책감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고 마음
아파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죄책감은 새로운
삶에 대한 갈망을 불태우는
연료와 같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하기 위해
예수님은 죄책감으로 아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오셨던 것입니다. 그들을 책망하고
정죄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있지 않고 일어나
앞으로 나갈 수 있게
도와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들의
죄책감이 새로운 삶에 대한
갈망을 불러 일으키는 연료가
되게 하셨습니다.
특히 베드로를 보면 그것을
명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모두
예수를 버렸지만 베드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를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세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죄책감이 더 컸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어보니 근심하였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요한복음 21:17)
죄책감이 있었기 때문에 근심하였던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떳떳하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겨우 말했던 것입니다. 자기가 그런
말을 할 자격도 없다는
마음으로 겨우 말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번이나 물으니 근심하였던
것이지요.
왜 예수님께서 세번 물으셨는가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세번
부인했기 때문에? 숫자적으로 맞추기
위해 세번 물으셨던 것입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들어야
하는 어려운 말을 꺼내려고
하는 예수님은 베드로의 사랑을
확실히 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만
그에게 닥칠 일을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제한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번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세번 다 필레오 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답을 합니다.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필레오는 사랑의 관계에서 나오는
친구의 사랑입니다.
자기가 한 일을 생각하면
베드로가 감히 필레오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못했겠지요. 예수님은 그것을
이해하시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가페라는
단어를 베드로의 입에서 들으려고
세번 질문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번 물으시고 베드로에게 일어날
엄청난 일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요한복음 21:18, 19)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이 세번
물으실 때,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의 죄책감만을 생각했기 때문에
근심했던 것입니다. 자기 죄책감
속에 빠져 있는 베드로를
예수님은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다시 세우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다시 예수에 대한 사랑을
마음 속에 새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저
죄책감만을 갖고 아파하기 보다는
새로운 삶을 베드로가 살기를
주님은 원하셨습니다.
죄책감으로 시달리는 베드로를 바꾸셨습니다. 죄책감이
그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만들어내는 연료가 되게
하셨습니다. 세번이나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죄책감으로 말미암아
주저 앉지 말고 일어나
새로운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죄책감이 사랑과 연결이 될 때에
그것은 새로운 삶을 살게하는
힘이 됩니다. 그러나 죄책감이
분노나 두려움과 연결이 될 때에, 당신을
무너뜨리는 부정적인 힘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린도후서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하나님의 사랑과 연결된 죄책감입니다. 그러나
세상 근심은 우리의 자존심, 두려움, 분노와
연결된 죄책감입니다.
우리의 죄책감이 자존심과 연결이
될 때에 자기 합리화를 하게
됩니다.
자기의 행동을 합리화 함으로
자기의 죄책감을 덜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책감이 두려움과 분노와
연결이 될 때에, self-punishment,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처벌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때 우리는
무기력해지고 우리의 모든 노력이
마비되고 맙니다. 어두워지고, 우울해지고,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망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죄책감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연결이 될 때에, 자기의
잘못을 인정할 뿐 아니라, 변할
수 있는 소망을 보게 됩니다. 죄책감
속에 숨어 있는 소망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죄책감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겸손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강하게
만듭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만들어
냅니다.
베드로의 죄책감이 변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으로 변했을 때, 베드로는
강해졌습니다. 그리고 담대해졌습니다.
죄책감의 무거운 짐으로 고통
받는 분들이 있다면 주님께
나오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28-30)
주님께 나오십시오. 여러분의 무거운
짐을 주님 앞에 내려
놓으시고 쉼을 얻으십시오. 새로운 힘으로
앞으로 나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