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2024년 11월 10일)
마가복음 12장 38-44절
“마음을 보시는 주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 마음에 대해서 잘 보살피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당장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가장
중심을 뜻하며, 존재의 뿌리를 뜻합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 4:23)
그런데도 우리는 마음에 대해서 문외한이 되어 버렸습니다. 마음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 관심도 없고 신경도 쓰지 않으며 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속사람보다 겉사람에 대해서 치중하며 사는 것이 편하고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모 뿐만 아니라, 육체의 쾌락을 추구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겉사람을 추구하는 삶은,
화려할 수 있고, 무언가를 당장에 이루는 것 같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감으로 만족하는 삶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마음을
방치할 때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병폐는 상당하다 라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욕심과 야망으로 우리의 마음이 가득차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의 삶은
욕심과 야망의 노예가 되어서, 말할 수 없이 폭력적인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폭력의 가해자가 되고 폭력의 피해자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40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막 12:40)
이 말씀이 너무나 이상하지 않습니까? 종교지도자들이 길게 기도하면서,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있으니 말입니다.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특히 신명기를 보면 구구절절이 사회적 약자들인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약탈하지
말고, 돌보라고 하지만,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해야 할 서기관들은 과부를 탈취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마음에 대해서 방치하고, 마음에 욕심과 야망을 채울 때에 일어나는 모순인 것입니다. 자신들이 지금 어떠한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알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겉사람의 영역, 즉 권력이 가져다 주는 쾌락에 흠뻑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막 12:38-39)
만약 여러분들도 모든 것을 신앙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살려고 하지만, 모순되는 상황을
만나게 된다면, 그 원인은 다른 데에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겉사람의 영역을 아무리 개선해도, 속사람의 영역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보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기경해야 합니다. 뽑아 낼 것은
뽑아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에서 유사한 말씀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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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눅 6:45)
우리가 마음을 기경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불일치, 모순, 넌센스의 상황을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 없이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순간을 모면하려고, 거짓말을 하고 그러다가 거짓이 들통이 나면, 또 다른 거짓말과 변명을 하게 되는데, 이것 또한
마음을 살피지 못하여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헨리 나우엔은 오래 전에 이미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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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지도자들은 무엇보다도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 보고 직시하고 명료하게 표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요.
What we can say or do 보다 Who we are 가 너무나 중요한 것이고, 우리의 존재는 마음과 깊이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뒷 부분에 나오는 과부는, 서기관들이 앞 부분에서 가산을 삼킨 과부인지 아닌지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을
통틀어, 오늘 본문에만 과부가 등장하는 것을 볼 때에, 같은 인물이라고 여겨집니다. 만일 동일한 인물이라면,
이 과부는 가산을 모두 서기관들에게 빼앗기고
남은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었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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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3절)
예수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두 보고 계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히 4:13)
서기관들은 욕심과 야망으로 그들의 마음이 가득차 있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긴 기도를 하는 것도 다 보셨습니다. 반면에 과부는 가진 것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그녀의 가난한 마음을 주님은 보셨습니다.
지금 저는 헌금을 많이 내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또한 헌금을 적게 내도 된다는 말도 아닙니다.
과부는, 그 당시는
더욱 더 그렇듯이, 생계가 막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과부가
아니라 예수님은 말하길, “가난한 과부”라고 하고 있습니다.
과부는 하나님 밖에 이제는 더 이상 의지할
분이 없어서,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 자신의 미래를 의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부의 헌금이
이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보다 많이 낸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욕심과 야망으로 채워지기 보다, 가난한 마음, 가난한 심령이 되길 바랍니다.
나를 의지하지 않고,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마음이 바로 가난한 마음입니다. 또한 나를 탓하지 않고,
세상을 탓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마음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반면에, 내가 시간이
남을 때에 하나님을 찾고, 내가 돈이 남을 때에 헌금하고 하는 마음은, 가난한 마음이 아닙니다. 구약의 사르밧 과부처럼,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과부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셨을 줄로 믿습니다.
열왕기상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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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르밧 과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해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왕상 17:15-16)
현실을 보면 미래는 닫힌 것 같지만, 거기에 주저 앉아 있지 않고,
성전으로 나아가, 가난한 마음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미래를 맡겨드렸습니다. 어찌 하나님께서 그녀의 미래를 열어 주시고, 책임져 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을 스스로 지키겠다는 마음은 바벨탑의 마음입니다. 곧 무너지고 흩어짐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만을 사랑할 때에,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지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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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7)
우리가 온전히 비워졌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바로 그것 아닙니까?
사도 바울은 몇 절 뒤로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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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후 4:16-18)
오늘 본문의 과부는,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가난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마음이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영원한 것들을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주님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려고 하는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 포기하지
마십시다. 우리 유혹에 넘어가지 마십시다. 세상이 악하고, 거짓과 욕망이 넘쳐날 지라도,
우리의 마음을 지킵시다. 그리고 우리의 가난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립시다.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