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2024년 10월 20일)
마가복음 10장 35-45절
“예수님을 왜 믿는가?”
오늘 성가대가 부른 찬양의 제목이 “우리는 주를 믿는 자”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주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일에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찬양의 가사처럼,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를 믿는 자들인데 “왜 주를 믿느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를 믿게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과는 다릅니다. 여러분들에게 “왜 주를 믿느냐?” 라는 질문에 대답할 시간을 조금 드리겠습니다. “왜 예수님을 믿느냐?”
라는 질문에 대한 여러분들의 답은 무엇입니까?
우리 이민자들에게 신앙은 우리의 삶에 매우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 왔습니다. 소수민족으로서 우리에게는 힘이 없었고, 가진 것도 없었고, 언어도 부족하고 문화도 낯설어서, 이 사회의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었습니다.
자녀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도 잘 몰랐습니다.
그냥 스스로 알아서 해결했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신앙과 교회는 큰
역할을 감당했었습니다.
저도 1991년에
이민와서 곧바로 식구들과 함께 식당에서 일하면서,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났고 5년 동안 그렇게 살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생존해야 하기에, 때로는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고, 철야기도를
금요일 밤에 간혹 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신앙은
이와 같이, 우리로 하여금 이민의 삶을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었고, 도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정도는 달라도 공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성가인 “주님여 이 손을”을 오랫동안 불러 왔던 것도 동일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 그러한 신앙의 필요성은 필요 불가결한 것이지만 전부는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한
두 가지는 얻을 수 있겠지만, 많은 것을 또는 더 중요한 것을 잃을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 제한적인 신앙, 그리고 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신앙은, 우리의 삶을
제한시키고, 고착화시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왜 믿는 것인지를요. 그들은 마가복음의 순서에 의하면 이제 곧 예수님을 따라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예수님에게 요청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막 10:35-37)
“주의 영광중에” 라는 말을 그들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에 로마제국을 쫓아내고, 기존 종교세력을 뒤엎어서 새로운 세상을 이루실 그 날을 뜻했습니다. 적어도 제자들에게는요.
야고보와 요한은 이전에 산 정상에서 영화롭게 변화된 예수님을 기억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때처럼, 자기들도 예수님의 영광 중에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왼편에 위치하기를 바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지나치게 가혹한 판단을 내리지는 마십시다.
마가복음의 특징이, 제자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라고 그려내고 있더라도 말입니다.
우리도 오십보 백보이고,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고 정직하게 질문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왜 믿고 있는지를요. 예수님을 나의 어젠더와 나의 목적만을 위해서 믿을 때에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들이 반드시 있기 때문입니다.
원하고 이루고자 하는 것은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을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개인의 성공과 출세만을 위하여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떠한 분이시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떠한 말씀을 하실 것입니까?
우리 딴에는 매우 급하고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억압보다는 자유를 누리고자, 높은 위치에 올라가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 자체가
이미 권력에 노예된 모습이 아닙니까?
그래서 정작 먹고 살만하게 되면, 신앙의 끈을 놓아 버리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이미 오늘 본문 전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지가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5-36)
지난 두 번의 수요특별예배에서 계속해서 듣는 것은, “스스로”의 문제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 자기 머리를 의지할 때에, 우리의 삶은 바벨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탑은 결국 무너지고 흩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런 의미에서, 이 세상의 원칙에 정반대입니다. 더 나아가서, 바벨탑 사건을 되돌려 놓았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counter-cultural 즉 반문화적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높아지고, 권세를 누리려는 인간의 불쌍한 모습에서 풀어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진정으로 세워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시 그 무거운 멍에를 스스로에게 지우고자 하는 것 아닙니까?
내가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면, 반드시 밑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길 외에는 구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3-45)
이것이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메시지입니다. 왜
믿느냐의 질문에서 이제는 무엇을 믿느냐의 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력을 추구하기 보다, 사랑을 추구하십시다. 그것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고 따라가는 자의 삶의 내용이고 모습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자유함을 경험하고, 구원을 얻은 사람만이 예수님처럼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높이기 보다, 하나님이 높이시는 것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주는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부활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큰 자가 진정으로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범이 되셨습니다.
섬기는 것은 약자의 몫이다 라는 생각은 바벨탑의 생각입니다.
“스스로”의 생각이고, self-serving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예수님처럼 살기를 즐겨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wellbeing을 보살피는 것입니다. 그의 삶은
self-giving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섬김은 행동이나 말이 아니라,
삶이고 존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더 깊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존재를 바꾸고, 가치관을 바꾸어서,
예수님처럼 생명을 일으키는 섬김의 삶을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
어떤 통계의 의하면, 사람에게 깨달음이 일어나고,
감동이 일어날 때에, 그 사람은 건강하게 오래 산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신앙생활이 너무나 중요하고 생명줄이 되는 것입니다.
수요특별예배에서 어떤 교우가 그럽니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고요.
이제야 조금 더 볼 수 있게 되었다고요. 그런 깨달음이 너무나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섬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사랑으로 섬길 때에 찾아오는 감동은,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감동입니다. 영혼을 살찌우는 감동입니다. 그래서
삶의 원칙에 대한 확신이 더 강해지고,
그런 삶을 꾸준히 살아갈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배우고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섬김의 자리에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악순환의 반대인 선순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절대로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현대 신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천들은 많은데 제자들은 없다고요. 영어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A
Christian but not a disciple.
이런 현상에 우리는 왜 예수님을 믿느냐와 무엇을 믿고자 하느냐의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 또한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를 온전히 끌어안지 못한 현상인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매여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십자가에 담겨진 놀라운 복음을 깊이 깨닫고, 거기서 흘러 넘치는 사랑으로 섬김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광만을 바랬던 야고보도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후에, 열 두 제자 중 가장 먼저 순교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순교는 배교할 수도 있지만 하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경우가
됩니다. 무엇을
믿는지가 확신이 되니 어떻게 살아가고 또 어떻게 죽어야 함도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의 삶과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진정으로 섬김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을 믿는지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을 다시 만나는 그 순간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