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2024년 9월 8일)
간구의 결과는 반드시 있다
마가복음 7장 24-30절
오늘 본문 26절을 보면 “간구”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6절)
간구는 한자로 풀이하면 “간절히 바라다”
입니다. 원어로
보니, request, ask, pray의 뜻이 있습니다. 어떤 부모가 자식이 아픈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겠습니까? 아이들이 아프면 내가 대신 아프길 원하는 것이 부모이고, 자녀들을 위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할 것입니다. 이전에 김인기 목사님이 따님 그레이스가 태어날 때의 어려움을 말씀하셨는데, 채플에 가서 하나님께 간구하셨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떤 부모가 자식이 아픈데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의
여인의 간구는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무엇보다도 여인의 간구에 대한 예수님의 사뭇
냉랭한 반응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27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7절)
요한복음에서 반복되어서 나오는 그 “때”가 아닌 것처럼, 아직은 이방인에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때가 아니어서 일까요? 그런데 상식적으로 이러한 반응 앞에서 어떤 누구도 아무렇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물러섰을 지 모르겠습니다.
더군다나 이 여인의 사회적 신분은 스스로 쉽게 포기하기에 충분히 낮고 소외되었습니다. 귀신들린 딸을 둔 이방인이었습니다. 남편은 어디에 있는지 본문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먼저 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유대인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고,
성치 못한 자녀를 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이
여인의 처지와 동일시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민자로서, 번듯한 직장에 다니거나 사업을 운영하지 못하면서, 이 사회의 언저리에서 주변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간혹 정당한 권리가 침해되어도, 그리고 인종 차별을 받아도,
스스로의 처지를 자책하면서 또는 합리화하면서, 그저 생계를 유지할 뿐입니다. 아니면 내가 한국에 있을 때에 잘 나갔는데 하거나, 왕년에 내가 이랬고 저랬고 한 사람인데 하면서, 분노하면서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지 모르겠습니다. 2세들은 대체적으로 1세들보다는 좀더 형편이 나아져서 model minority 즉 “모범적 소수민족”이라는 범주에 속하면서, 상류사회 근처에 진입한 소수인종으로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경제적인 상황은 좋아졌을 지 모르지만 영적인 상황은 그리 좋아진 것은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반응에 이 여인은 뭐라고 답하고 있습니까? 28절입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8절)
이 여인에 대답에는 간절함에서 나오는 지혜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여전히 존경심과 간절함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녀에게 믿음이 있었다 없었다 라고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녀의
무언가가 예수님을 움직였다 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구원의 역사를 허락하셨을까요?
그 여인은 그 당시 정치, 사회, 종교적인 잣대로는 절대로 은혜의 수혜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 믿음 아닙니까?
동일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마태복음에서는 그러기에 다음과 같이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 15:28)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보셨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
라도 간구하는 이 여인의 간절함을 보시고, 구원의 역사를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열두 해 혈루증을 앓아 온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을 만진 믿음과 같습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마 9:20-21)
이처럼 믿음은 정적이지 않습니다. 살아 움직이고 꿈틀거리고 생명력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한계에 또는 현실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나의 판단, 감정, 경험을 뛰어 넘게 합니다. 분노나 저주나 모욕감에 휩싸이지 않습니다.
이 여인은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도망가지도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알량한 자존심도 부리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그저 한 걸음 만 더 나아가면서, 예수님께 한 번 더 간구했던 것입니다. 믿음은 간구하게 하고,
그런 간구에는 반드시 결과가 있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마십시다. 내 안에 머무르지 마십시다.
오늘 본문의 여인의 행동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5-26절)
간절하고 겸손한 믿음이 그녀를 움직이게 하고 말하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야고보서 기자는 믿음과 행동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약 2:22)
심지어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지나치게 감정적이다 라는 것입니다. 체면을 따지는 것도 감정적인 모습입니다. 지나친 수치심과 자격지심도 감정적인 모습입니다. 이것들이 우리의 믿음을 제한시키고 있습니다. 상황 판단을 하는 것과 거기에 따라오는 감정들을 구분해야 합니다. 그것을 습관대로, 해오던 대로,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은, 신앙의 모습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지혜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쉽게 포기하면서, 여기 저기를 기웃거릴 것입니다. 그것은 도피이고, 자기 합리화일 뿐입니다. 존재가 절대로 강건해지지 못합니다.
모든 일에 한 걸음만 더 뗍시다. 그 한 걸음이 많은 것을 바꿔 놓을 것입니다. 변화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변화는 한 걸음부터 시작됩니다.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만 더 내딛고, 한번만 더 생각하고,
한번만 더 움직일 때에, 놀라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들에게 커다란 힘이 되고, 삶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도 유사한 말을 했습니다.
Faith
is taking the first step even when you can’t see the whole staircase.
믿음은 계단
전체를 볼 수 없을지라도 첫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간구할 때에 반드시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던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어린 딸에게서 귀신이 나간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더 귀한 결과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여인의 믿음 때문에 그 가정이 살아난 것은 물론입니다. 그런데, 이방 지역에도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예수님을 증거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가나안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내 때가 아니라고 하셨지만, 모친의 요청대로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믿음의 간구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침노를 당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포기하지 않는 믿음으로 간구하는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신분이 어떠하든지,
상황이 어떠하든지, 믿음으로 간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당면한 문제들은 무엇입니까? 그
어떠한 문제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십시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처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럴 때에 여러분들이 살아나고, 여러분들의 가정이 살아나고,
여러분들이 속한 구역과 선교회, 그리고 이 교회가 살아날 것입니다.
믿음으로 한 걸음만 더, 계속해서 떼고 나아가는 영적인 여정을 걸어 가십시다. 여러분들의 속사람이 정금처럼 순결해질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속사람이 강건해질 것입니다. 간구에는 결과가
반드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