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1일
성경: 야고보서 1:17-27
설교: 들으라!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남겨 주셨습니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야고보서 1:19)
이것이 우리의 삶의 교훈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가르침이 우리의 삶을 주장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듣지 않을 때, 속히 말하고, 쉽게 성낼 때, 우리는 여러가지의 문제를 당하게 됩니다. 우리가 한 말 때문에 후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것입니다. 우리의 관계에 금이 가게 될 것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영적 훈련인데 현대에 와서 잊혀져 버렸습니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전통을 다시 살려야 합니다. 듣는다는 것은 예술입니다. 듣는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을 때, 우리는 삶의 신비를 들을 수 있게될 것이고 그것을 들을 때, 우리의 마음은 기쁨으로 또한 놀라움으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듣는다는 것이 그저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이, 연습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듣는다는 것은 그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리는 듣지만 실제로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가복음 4:9)
우리에게 다 귀가 있지만 듣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듣는다는 것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베토벤은 44세 혹은 45세에 그의 청력을 다 잃었습니다. 온전히 듣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청력을 다 잃고 나서, 그는 사람들과 관계를 다 끊어 버렸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그 관계를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연주도 하지 않았고, 공식적인 자리에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도시를 떠나 시골로 들어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아름다운 자연과 접하게 되었습니다.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 졸졸 흐르는 시냇물의 흐르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그는 자기의 귀로 들을 수 있는 것보다 더 선명하게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그 유명한 교향곡 제 6번 소위 전원 교향곡이라는 아름다운 곡을 작곡했습니다.
듣는다는 것은 귀로 소리를 듣는 것만이 아닙니다. 베토벤은 그의 상상력으로 아주 청명하게 자연을 들었습니다. 귀로 들을 수 있을 때보다 더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소리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듣는데 도움이 되기 보다는 방해가 될 때가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정작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듣기 위해 우리는 조용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는 새벽에 저는 가장 잘 듣습니다. 모든 것이 다 고요할 때, 아주 선명하게 하나님의 소리가 들립니다. 주로 저는 운전하면서 라디오를 틀지 않습니다. 그저 조용히 운전하며 듣기를 원합니다. 그때 많은 소리가 들립니다. 아주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영어로 보면 조용하다는 단어와 듣는다는 단어가 똑같은 알파벳으로 쓰여져 있는 것을 봅니다.
L-I-S-T-E-N
S-I-L-E-N-T
우리 자신을 조용하게 하는 것 - 어떤 소리도 없는 곳에 가 있는 것 - 그것이 우리 Inner voice를 듣는데 가장 좋은 곳입니다. 고요한 것을 소리로 채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소리가 없으면 불안해합니다. 빈 것 같은 느낌, 공허한 느낌을 싫어합니다. 고요함과 빈 것, 공허한 것을 일치 시킵니다. 그러니 고요함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고요함과 친구가 되십시오. 여러분들은 놀라운 것을 들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듣기를 원한다면, 자기 자신을 고요케하는 것이 가장 먼저 되어야 되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소리만 고요케하지 마시고, 여러분 속에 있는 분노, 편견, 걱정, 두려움, 이런 것들을 다 고요케 하십시오. 뭔가 이전에 듣지 못했던 것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편 46:10)
여러분의 마음 속에 있는 편견 때문에 여러분은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듣게 됩니다. 나의 판단으로 남의 말을 잘못 듣게 됩니다. 왜곡하여 말을 듣게 됩니다.
사람들은 아주 selective 하게
듣습니다. 부자나 힘 있는 자의 말은 잘 듣습니다. 듣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힘 없는 자의 말은 사람들은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외쳐도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힘 없고 연약한 자, voice가 없는 자들의 말을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연약하고 불의로 인하여 고통 받는 사람들의 말을 듣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권력 있는 사람들 밑에서 노예로 시달리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출애굽기 2:23, 24)
하갈이 그의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광야로 쫓겨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창세기 21:16, 17)
하나님은 연약하고 불쌍하고 불의로 고통 받는 자들의 소리를 듣습니다.
듣는다는 것이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경청하여 듣는다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 관심이 있고 신경을 쓴다는 말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많은 에너지를 요구합니다. 제가 카운셀링을 하면서 들을 때, 한시간만 들으면 진이 다 빠집니다. 그 다음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 버립니다.
듣는 훈련이 영적 훈련의 가장 기초적인 것이고 중심적인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설교라고 하는 것이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나 아닙니다. 말하는 것은 한 15-20분 정도이지만 그 말을 하기 위해 듣는 시간은 수 많은 시간이 들어갑니다. 거기서 들은 것을 잠깐 말할 뿐이지요.
저는 듣는 것이 우리에게 해주는 것에 대해 간단하게 세가지를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1.
듣는 것은 우리에게 깨달음을 줍니다.
편견이 없이 다른 사람들을 잘 들을 때, 우리는 그들에 대해 더 깊은 깨달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편견을 내려놓고, 잘 경청하면 그 사람이 누구인가 잘 알게될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잘 들으면 자신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을 갖게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이 깊어질 것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소리를 듣는다면, 의사를 만나봐야할 것입니다.
시간을 내서 여러분의 삶을 잘 들어 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대해 더 깊은 깨달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더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듣는다는 것은 깨달음을 줄 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변화시켜줄 것입니다.
제대로 들을 때, 여러분은 변화될 것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의 소리를 잘 들을 때, 여러분은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들을 수 있을 때, 여러분은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엘리야는 홀로 됨을 느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열왕기상 19:18)
그는 그것을 들었을 때에, 자기 자신의 Depression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전에 그는 죽여달라고 하였습니다. 더이상 할 수 없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었을 때, 그는 새롭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듣고 깨닫는 것이 여러분에게 자유함을 줍니다.
3.
듣는 것은 일치를 가져옵니다.
관계가 깨질 때, 제일 먼저 망가지는 것이 바로 대화입니다. 대화와 소통이 깨집니다. 우리는 서로 듣지 않습니다. 결혼 관계에 있어서도 관계가 올바르지 못하면 대화가 사라집니다. 서로 듣지 못합니다. 듣는 것을 아예 포기합니다. 서로 듣기를 원치 않습니다.
사랑은 어떤 로맨틱한 기분이 아닙니다. 사랑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사랑은 바로 듣는 것입니다. 듣는 것이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서로 경청하여 들을 때, 여러분은 하나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 기도는 우리 모두가 다 하나가 되는 기도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한복음 17:23)
그런데 바로 전에 예수님은 또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요한복음 17:8)
일치는 들음에서 나옵니다. 진리를 들음에서 나옵니다. 진정한 들음이 있는 곳에 분열이 사라지고 조화와 일치가 생깁니다. 우리의 차이가 우리를 갈라놓지 못합니다. 우리의 차이가 오히려 우리를 온전하게 만듭니다. 나홀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합니다. 우리가 잘 들을 때, 우리의 차이는 우리를 온전하게할 것입니다. 다른 목소리가 모여 불협화음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