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2024년 8월 18일)
에베소서 5장 15-21절
“지혜로운 삶”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자 하지,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누구도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혜에 대한 생각은 어떻습니까?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래서 지혜에 대한 이해와 감사가
부족한 것은 아닌지요? 그 원인에는, 이 세상의 풍조가 그렇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정치, 경제, 사상, 예술, 종교 등의 모든 분야에서 지혜로운 사람을 찾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아졌습니다. 지혜를 발휘해야 할 위치와 입장에 있지만 결국은 그러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존경하고 흠모할 만한 사람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지혜에 대해서 큰 의미를 주지 않게 되었습니다. 특히나 젊은 사람들에게는 “지혜”라고 하면 오래된 유물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보다, 그저 똑똑한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그것이 당장에 결과를 가져다 주고, 당장에 자신에게 만족과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똑똑하게 사회 생활을 잘하고,
가정 생활도 잘하길 원합니다.
그런데, 똑똑한 사람이
되려고 하다가, 헛똑똑이로 남아 버리는 경우가 발생한다 라는 것입니다. 본인은 굉장히 똑 부러지고, 자신에게 그리고 가족에게 중요한 것들을 제공하려고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인의 생각이거나, 이 세상이 권장하는 삶의 모습일 뿐입니다. 결국은 인생의 더 중요한 것들을 놓치면서 살아가는 것도 모르는 채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같은 맥락에서, 이해력이 높고,
정보와 지식이 많다고 지혜로운 사람이 자동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학력이 높고,
공부를 많이 했다고, 자동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똑똑한 사람이 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아닙니다. 각 분야에서, 고도의 숙련된 기술자들이 될 수는 있겠지만, 삶의 대한 지혜가 결여되는 모순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만큼,
지혜는 아름답고 숭고하지만, 이루기는 어렵다 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공감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보배와 같은 이 지혜는 어떤 사람에게 주어진다 라는 말입니까? 그래서 어둠에 빛을 가져다 주고, 절망 가운데 소망을 주며,
갈등의 관계를 중재하고 완화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당장 개인의 이익 보다, 공동체의 선을 위하고,
인류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에게 지혜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추구함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지혜에 관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15절과 17절을 보면,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대조가 나옵니다.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
지혜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
어느 상황에서든지 필요한 삶의 요소입니다. 개인에게도 필요하고 단체에서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어리석음은 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격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즘 미국 대통령 선거에 관련된 글들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이 있어서 읽게 되었습니다. “Collective Stupidity” “집단적 어리석음”이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어떤 단체에서는, 몇 명의 리더들의 어리석음이 그 단체를 더욱 더 어리석음으로 인도하고 있으며 군중들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그들의
어리석음을 때로는 celebrate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리더들에 대한 맹신적인 지지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격이 아닙니까?
오늘 본문에 나타난 어리석은 자의 삶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세월을 허비할 뿐입니다. 때가 악한 지도 모르고 살아갈 것입니다. 반면에 지혜로운
사람은, 세월을 아끼고, 때가 악한 것을 알고 준비하고 대비할 것입니다. 또한, 어리석은 사람은, 술에 취하고,
쾌락과 유흥에 취하여 방탕한 삶을 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성령으로 채워지길 바랄 것입니다.
그것이 18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8절)
오늘 본문을 묵상하다가 깨닫게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
그러니까 헛똑똑이는,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지식과 정보를 채우고, 재물과 권력을 축적하는 사람이라면, 지혜로운 사람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들이 채워지기 바라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지혜는 하나님만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이 어리석어 보여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겠지요.
그러나 이 길만이 하나님의 지혜를 경험하는
길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어서, 지혜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지혜로운 자가 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됩니다. 그러나,
나는 질그릇이고 오직 능력이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음을 깨달았던 바울이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7)
사도 바울만큼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표창장처럼, 훈장처럼,
붙어 있었던 종교적인 우위와 도덕적인 우위를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비우고, 내려 놓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겸손 아닙니까? 그리고 그것이 결국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 아닙니까? 그럴 때에 하나님은 지혜를 선물로 내려 주시고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의 아름다운 역사입니다.
잠언 기자도 그것을 꿰뚫어 알고 있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 9:10)
이것이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 아닙니까?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입니다.
축적이 아니라 비움과 내려 놓음 입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바로 그것을 증명하지 않았습니까? 비우고 내려 놓고, 죽기까지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 부활의 능력으로 살리셨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실천하는 사람이야말로 신앙의 진수를 그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반드시 보배와 같은 지혜를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유대교에서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집착할 수 있는 세 가지 요소에 대해서 제어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에 대해서는 안식일로, 재물에 대해서는 십일조로,
음식에 대해서는 음식 규칙으로 떼어 놓고, 내려 놓고, 스스로를 제어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우상이 되지 않으려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 18절 말씀도 동일한 맥락의 말씀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8절)
내 맘대로, 내 욕심대로,
채우고 탐닉하는 삶은 방탕한 삶입니다. 거기에는 지혜가 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방탕”이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도 사용된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눅 15:13)
지혜가 없으니 허랑방탕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이처럼 욕심, 허영, 방탕함과 공존할 수 없습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자에게 그래서 지혜를 선물로 주시며, 지혜를 통해서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한 달 전에 김목사님과 함께 피커링 따님 댁에 계시는 김창옥 권사님을 심방했을 때가
생각이 납니다. 예배 후에 따님 되는 윤혜영 집사님과 앞으로 있을 장례에 대해서 의논하다가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엄마가 바보인줄 알았습니다.
아빠 앞에서 한 마디도 못하고
그냥 그렇게 살아가신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라고요. 모든 것을 준비하셨고, 믿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권사님을 보고는, 따님의 눈이 열렸던 것입니다.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어머니의 대한 생각이
하루 아침에 산산이 깨지면서, 새롭게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니, 진정한 실체를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어머니의 삶에 극히 일부분을 보았던 것인데, 이젠 전체 그림을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제도 윤혜영 집사님과 통화를 했습니다.
권사님은 많은 고통 가운데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우리가 내 자신을 비우고 내려 놓기 시작할 때에, 그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간구할 때에, 하나님은 지혜를 선물로 주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또한 선물로 주십니다. 지혜의 충만은,
성령의 충만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두 주시는 것이니 당연한 것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한 사도행전을 봐도 그러한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열 두 사도들이 구제하는 일을 맡길 일곱 명을 선택하고자 할 때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골랐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행 6:3)
하나님을 위해서 비우고, 내려 놓을 때에,
하나님이 친히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성령을 주셔서, 아름다운 삶,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하고,
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능력이 지혜와 성령으로 우리에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기본 틀입니다. 우리는 위에서부터 내려 주시는 것을 받아서 누릴 뿐입니다. 그러한 사람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은, 오늘 본문
마지막 부분인 19절로 21절까지에 나오는데,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서로에게 복종하는 아름답고 충만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진정한 찬송을 부르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서로를 복종하는 사람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을 향하여 늘 겸손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늘 간구하고, 하나님을 늘 의지하며 살아가십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혜와 성령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어리석음과 어둠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며, 우리 각자의 소명을 너끈히 감당하는 복된 삶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