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2024년 7월 14일)
에베소서 1장 3-14절
신령한 복을 받은 교회
오늘
본문은 에베소서 1장에서 인사말 다음으로 나오는 부분인데,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 내용이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을 주시고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시편과도 같다고 하고 찬송시와도 같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또한 원어로 볼 때에 한 문장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한 숨에, 아니 한 붓에 아름다운 찬송시를 써내려 갔던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한 그의 사랑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첫 부분을 보면 “찬송하리로다”
라고 시작하는데, 이는 유대교의 전통인 Berakah, 즉 Blessing 을
이어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영어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Blessed be the God
오늘 본문에는 수많은 중요한 신학적인 내용이 들어 있고, 아름다운 만큼, 여러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지만, 오늘은 한
가지 만을 가지고 묵상하고자 합니다.
그것과 연관하여 오늘 본문의 수취인이 누구인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에베소서 1장 1절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엡 1:1)
영어 성경은 Saints and Faithful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우리에게 익숙할 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서는 매우 생소한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불려지기 시작한 명칭들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거룩하게 되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의
다른 이름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통해서 에베소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수요예배에서 배웠습니다. 사도행전 18장부터
21장까지에는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한 바울의
행적이 잘 나와 있습니다. 2차 전도여행과 3차 전도여행에 모두 들렀던 에베소입니다. 그만큼 바울의
헌신과 애정이 깃든 에베소입니다.
바울 당시의 교회들은, 마치 갓 태어난 아기와 같은 교회들이었습니다. 옛 것과 새 것이 공존하면서,
새로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도 유대인과 이방인 믿는 자들이 모두 모여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행 19:17-18)
에베소 교회 안에는 한 가지 인종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가지 문화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막 시작한 교회에게 바울은 교회가 어떤 곳인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마치 선지자처럼 받아 써내려 갔던 것입니다.
어느 모임이나 집단에는 분파가 존재합니다. 각자의 문화와 전통과 사상을 주장하고 지켜 나가려고 합니다. 익숙함과 편리함을 지속하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을 보면 유대인과 헬라인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2-24)
동일하게 바울은 오늘 에베소 교회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매우 특별한 곳이다 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나 인간이 주도하는 곳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부자이기 때문에, 유대인이기 때문에,
남자이기 때문에, 나이가 많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 내에서 우선권을 갖게 되지 않는다 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것들을 당연하게 여긴다면, 그곳은 교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가 속한 캐나다 장로교회는 노회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교단입니다. 노회는 동수의 목사와 동수의 장로로 구성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평등과 공존과
협의의 정신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노회원의 경우에, 정회원,
준회원이 따로 없습니다. 안수 받거나 위임 받았으면, 모두 정회원입니다.
그래서 연합교회와 달리 장로들도 안수를 받는
것입니다. 함께 섬기는 것입니다. 또한 담임목사와 부목사 모두 동일한 자격과 책임이 노회에서 주어집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면,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통일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 1:10)
이 “다” 라는 한 글자는 영어로 all things 입니다.
에베소서 2장도 동일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4-15)
“한 새 사람”을 One
New Humanity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더 이상,
이전의 가치와 사상이 존재하여,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모두 새로운 존재로서 서로 화평한 가운데 공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ntitlement 라는 말을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속한 집단 내에서 권리를 주장하고 혜택을 강요할 수 있는 태도를 뜻합니다. 에베소 교회 내에 유대인의 믿는 자들이 그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동일한 잣대로, 이방인으로 믿는 자들은,
스스로 거리를 두고, 방관자의 자세로 공동체 생활을 했을 지 모릅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을 시나리오이고, 바울의 편지를 받은 에베소 교회의 실정이었을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 전체에는, “우리” 라는 표현이 처음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으로서 믿는 자들을 뜻합니다. 그러다가 바울은 13절에서 “너희도” 라고 하면서 결론을 내리는데,
이들은 이방인으로서 믿는 자들을 뜻합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 1:13-14)
나중된 자가 먼저 될 수 있고, 먼저된 자가 나중 될 수 있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신령한 복을 받은 믿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자유자나 종이나 다 동일하게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신령한 복을 이 교회에 충만하게 내려 주시고 있습니다.
믿으십니까?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정하시고, 자녀 삼아 주시고,
기업이 되게 하시며, 영광의 찬송을 부르게 하십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받은 교회이고, 그 교회의
속한 여러분들입니다. 나에게 있는 무슨 공로나 업적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자녀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영적인 공동체 라는 말은, 하나님의 신령한 복을 받고,
그 복을 누릴 뿐만 아니라, 주변에 흘려 보내는 공동체라는 말입니다. 영적인 것은, 늘 위에서 아래로 흘러 내리는 방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을 흘러 넘치는 방향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미 약속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 12:2-3)
그런데 이처럼 신령한 복을 받고 누린 사람은, 더 이상 이전의 모습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세상의 가치나 인간의 장난이 주장하지 못합니다. 무엇이라도, 받은 바 은혜를 나누려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축복의 통로,
은혜의 통로가 되는 삶의 아름다움을 비로소
깨닫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Entitlement의 태도가 아니라, 감사와 심지어 빚진 자로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공동체에서 늘 주장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여 이용만 하기 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헌신하고 돌보는 영적인 사람들도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올해 표어인 “증인의 되는 삶”은, 그저 한번 외치는 구호가 아니고 한번 생각하는 슬로건도 아닙니다. 교회를 통하여 이 세상 가운데 당신의 복을 흘려 보내려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일어나는 새로운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은 각자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흘려 보내고, 교회 밖으로도 흘려 보내는 것입니다. 그 신령한 복은,
대립과 갈등의 담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에스겔이 성전에 본 이상처럼, 물이 발목과 무릎과 허리에 차서 큰 강을 만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삶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바울의 고백을 동일하게 외치게 될 것입니다. “찬송하리로다” Blessed be the Lord!
썸머 캠프가 2주 마쳤습니다.
지난 주는 참가한 어린이가 매일 66명에, 인턴 23명과 사역자들 합하면 90여명이 되었습니다.
점심시간에 친교실을 보니 바글바글합니다. 책상을 다 사용해야만 할 정도입니다. 사진 하나 보시지요.
이번 주는 100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다니는 어린이들이 약 60퍼센트 되고 나머지는 인근 지역에 살거나, 우리 교회 다니는 아이의 친구이거나, 다른 교회 다니지만 그 교회에는 썸머 캠프가 없어서 오는 아이들입니다. 이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별없이 진실하게 섬길 때에, 그 후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썸머 캠프 사역은,
우리가 받은 바 복을, 주변과 지역 사회에 나누고 흘려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신령한 복을 받았습니다.
아멘? 지금도 받고 있으면 앞으로도 받을 것입니다. 주변에 이 복을 나누는 더욱 영적인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