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7일
성경: 마가복음 6:1-13
설교: 편견이 은혜의 흐름을 막는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본다고 생각하는 것 - 그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문제로 보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요한복음 9:41)
우리가 본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를 무지하게 만듭니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여러분의 지식은 멈춥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의 제한된, 온전치 못한 지식이 더 깊은 깨달음을 가져오는 과정을 정지시켜 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 안다고 생각하는데 뭘 더 알려고 노력하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나사렛에 있는 사람들이 했던 일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 오셨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태어나셨지만 많은 사역을 가버나움에서 하셨습니다. 그곳은 나사렛에서 한 50 Km 떨어져 있던 곳이었습니다. 마태, 시몬 베드로, 그 형제,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들인 요한과 야고보, 그들의 고향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고향에 돌아와 회당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랐습니다. 그의 지혜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저 말을 권위있게 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면서 한다는 것을 그들은 느꼈습니다. 똑같은 반응을 가버나움의 사람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였습니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가복음 1:21, 22)
나사렛에서도 같은 반응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마가복음 6:2)
그들은 놀랐고 다들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나사렛에서의 반응은 가버나움에서의 반응과 달랐습니다.
그들이 다 메시지를 듣고 놀랐지만, 바로 그 다음에 그들은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마가복음 6:3)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의 편견이 치고 들어와 그들의 마음을 지배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진정으로 알았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지식이 올바른 지식이었습니까? 이 분이 그때부터 2,000년 동안 갈릴리 사람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알고, 사랑하고, 경배하는 그런 예수가 될 것이라는 것을 감히 짐작이라도 하였을까요? 이들은 이 예수가 다음 2,000년 동안 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영향을 주고 삶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그들에게 주었다는 것을 알았을까요?
그들이 예수를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예수에 대한 그들의 지식은 멈추었습니다. 그들의 지식은 더 앞으로 가지도 못하고, 더 깊어질 수도 없었습니다. 그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그들의 편견이 그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조종하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진정한 지식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더이상 그들은 배울 수도 없었고, 깨달을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들의 편견에 사로잡혀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깨달음이 잘못되었고, 제한되었다는 것도 모르고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는 오류 속에 그들은 살았습니다.
성경공부를 하다보면 어떤 사람들은 이제까지, 자기들이 잘못 알고 있었고, 잘못 살았다는 고백을 종종 듣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잘못 알고, 잘못 살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의 편견이 깨졌다는 말입니다. 더 큰 것을 보고 깨달을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아직도 그들의 편견 속에 싸여져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고향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참 슬픈 일입니다. 그들의 편견이 하나님의 능력을 묶어 버렸습니다.
마가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마가복음 6:5)
예수님께서 능력이 없어서 권능을 행하실 수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편견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하였고, 그들은 자기들의 편견 속에 갇히게 되었고, 그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 속에서 역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지식도 멈추었고, 그들의 이해도 멈추었고, 그들의 믿음도 멈추었습니다.
믿음이 그렇게 역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벌써 알고 있는 교리를 달달 외우고,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반복하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벌써 알고 있는 것, 나에게 편한 것, 내가 설명할 수 있는 것을 꼭 붙잡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갖고 있었던 종류의 믿음이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율법을 붙잡고, 율법을 지키고, 율법을 보호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그는 하나님을 지키고 보호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챤들을 잡아 가두고 죽였던 것이지요. 자기의 생각에 그들이 하나님을 무너뜨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챤들은 하나님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바울의 편견을 부서뜨리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이 두려웠던 것이지요. 바울은 하나님을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편견을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교리와 이론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release 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야 그 믿음의 진정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편견이 다 부서졌을 때, 그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봐야 할 것을 그는 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다메섹 경험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의 편견이 부서지는 경험이었습니다.
다메섹 경험 이후에, 바울은 믿음이 어둠의 세력을 무너뜨리는 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죄를 용서하는 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깨진 심령을 치유하는 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에게 이 믿음이 역사할 때, 여러분의 깨달음은 멈추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깨달음은 날이 갈수록 깊어질 뿐입니다. 절대로 멈추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넘어서서 이 깨달음은 계속 됩니다. 여러분의 작은 지식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release 합니다. 믿음이 있을 때, 여러분 속에 이 은혜가 흐르게 됩니다. 그때, 여러분은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여러분의 연약함이 도리어 여러분의 강함이 됩니다.
바울이 한번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그는 그것을 삼층천에 갔던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지식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그가 그것을 경험할 때,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그저 “I don’t know”, 나는 모르노라 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린도후서 12:2, 3)
이 경험 이후에 바로 그는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는 가시를 받았습니다. 그 가시가 그를 약하게 만들었습니다. 삶을 어렵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는 강해지고 싶었습니다. 누가 강해지고 싶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가시가 그를 약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가시를 뽑아주지 않습니다. 그는 강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것을 주셨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고린도후서 12:9)
가시를 제거하시는 대신, 그에게 은혜를 release 해 주셨습니다. 그를 강하게 하시지 않고, 그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강함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린도후서 12:10)
그것이 바로 은혜의 강함이고 은혜의 능력입니다. 믿음을 통해, 은혜가 여러분 속에 release 되고,
은혜의 능력으로 여러분의 연약함이 도리어 여러분의 강함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편견은 여러분의 지식을 멈출 뿐만 아니라, 신앙을 막아버립니다. 때문에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랐고 감명을 받았지만 신앙을 가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들 속에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다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배척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편견의 힘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마가복음 6:6)
여러분,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편견으로 가득차 있다면 여러분은 성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믿음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깨달음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크리스챤의 여정이라고 하는 것이 편견을 더덕 더덕 자신에게 씌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을 하나 하나씩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오묘함이 여러분의 마음을, 여러분의 인생을 가득 채우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