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2024년 6월 23일)
마가복음 4장 35-41절
“폭풍 가운데 함께 계시는 예수님”
고난이 우리에게 임할 때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게 되나요?
우리는 고난이 임할 때에, 그 고난을 없애려고 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한 태도에는 고난에 대한 우리의 특정한 이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에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길을 가다가 돌뿌리에 걸려
넘어졌다면, 금방 우리 입에서 튀어나는 말은, 재수 없게 왜 돌뿌리가
있어 가지고 넘어졌는가? 할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 빠진 자기 자신을 탓할 것입니다.
불평하고 짜증을 낼 것입니다. 이것 또한 고난에 대한 부정적인 이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코빗 전의 일이었습니다. 교회에 매주
나오셨던 교우였는데 몇 주 안 나오셔서 연락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삶의 어려움으로 인해서, 교회를 좀 쉬겠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삶의 어려움이 있다면, 더욱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새벽기도에 나와서 기도하거나, 아니면 목회자들을 초대해서 심방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쉬겠다고 하는 것도, 고난과 어려움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해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까?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마 9:12)
아프면 아픈대로, 괴로우면
괴로운 대로, 하나님께 나오기를 바라시는데, 우리는 고난과 어려움에
대한 잘못된 생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에, 그러니까 의인이 된
후에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과 어려움 또는 고통이 임할 때에 최대한 빨리
그것들을 없애려고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고통을 순간적으로 느끼지
못하게 하는
painkiller 즉 진통제가 상당히 많이 사용되고 있고, 또한 남용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고통의 원인을 다루기 보다, 증상만을 완화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미국만 해도 1년에 5.9
billion 달러가 진통제에 소비된다고 합니다. 고통을 다루는 북미에 사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고난과 어려움을 제대로
다루기 보다,
그런 것들로부터 도피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다른 이유를 대거나 합리화를 해도, 도망가는 것이고 도피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삶의 어려움을 늘 피하려고만 할 때에 일어나는 결과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히려 망가지게 됩니다. 인생에서 고난과 어려움을 제거하면,
삶이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아무것도 제대로 다루거나 이루지 못하는 매우
나약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군대에 있을 때에, 유격 훈련을
1년에 한 번씩 받았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유격 훈련 자체가 다소 위험하기
때문에, 유격 훈련을 시작할 때면, 훈련받는 모든 교육생들을 먼저 진흙탕에
빠지게 하고, 뒹굴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만신창이가 되어야, 몸을 더 이상 사리지 않게 되고, 그래야 안전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고난과 어려움이 임할 때에, 도망만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태연해 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도 도피의 다른 모습입니다. 고난이 임할 때에 도망가지 않고 제대로 다루어야 강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고난과 환란의 주제가 나오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가버나움에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지도를 보면, 가버나움의 반대편으로 가고자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정 속에서 큰 광풍을 만나 환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서 죽음의 위협을 받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배 뒤편에서 마치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주무시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을 그런 예수님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는 그 뒤의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
되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인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라는 말씀으로 인해서,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황망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보게 되는 메시지는, 이전에 보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고난과 어려움은 늘 우리에게 찾아올 터인데, 우리가
나 자신의 지식과 힘을 사용해서 고난을 없애거나, 또는 도피하고자 할 것인가? 아니면 나 자신을 내려 놓고, 온전히 예수님을 의지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에서 믿음도 그런 차원에서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은, 너희가 어찌 나를 아직도 믿지 못하느냐 라는 차원에서의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느냐?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믿느냐?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에만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힘들어 하는 일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반드시 있는 것을 믿느냐?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그래서 모든 일에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약 5:13)
사도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원래는 비두니아와 본도 지역으로 가려고 했지만, 성령께서 그 길을 막으셨습니다. 대신 드로아에서 마게도냐로 와 달라는 이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만약 바울이 자기가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 편하게 생각하는 것만을 고집 부렸다면, 그리고 드로아에서 받은 꿈에 대해서도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면, 복음이 유럽 땅에 전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면서, 너희들은 중간에 광풍을 만날 것이라고 했다면, 제자들이 그 배에 올랐을까요? 그리고 건너편에 있는 거라사인의 지방에 도착하면,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날 것이라고 했다면,
제자들이 그 배에 올랐을까요? 배에 타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진정 누구신지도 아직 몰랐고, 고난과 어려움에 대한 그들의 생각도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으셨고, 또한, 그들을 훈련시키시고자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첫 구절에서 무엇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나요?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5절)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한 분명한 목적이
있었고, 훈련 매뉴얼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고난을 당할 때에, 두려움이
전혀 없는 자들이 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무슨 수퍼 히어로들이 되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인생의 배에 늘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도움을 구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믿음입니다. 나는 질그릇 같은 존재이지만, 심히 능력이 큰 것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므로, 삶의 어려움과
환란 때문에 두려움이 몰려올 때에, 그것에 지나친 의미를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잘못된 결론을 내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대신, 여러분들의
감정 그대로,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가 아뢰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믿음입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라는 불평 섞인 말이, “주님, 우리를 구원해 주옵소서” 라는 기도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여러분들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 버리는 삶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에 경험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고, 하나님만을 늘 바라보고 구하는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고난과 어려움을 믿음으로 통과하여,
강해지고, 커지고, 깊어지는 존재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잘
나갈 때만 함께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인생의 바닥을 치는 그 곳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으로부터 숨고 싶은 그런 순간에도,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시편 기자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네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 139:7-10)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의
인생의 배에 예수님이 늘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들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늘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들이 때로는 느끼지 못할지라도 예수님은
늘 함께 하십니다. 우리 스스로가 고난을 다루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이
이겨낼 힘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있어야 할 믿음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늘 나와 함께 하시고 도와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그런 믿음이, 여러분들을 영생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있을 때에,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고요하고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에 김창옥 권사님이 입원해
있는 피커링 병원에 심방했습니다. 50분 정도 운전하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교우들이 한 분 한 분 우리 곁을 먼저 떠나고 있습니다. 마음이 서글픕니다. 그러나, 그들을 반드시 천국에서 다시
볼 수 있다는 믿음을 주시고, 그것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나, 죽었을 때도,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것을 믿을 때에, 우리가 우리의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바다보다 깊은 평강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