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참된 삶으로 가는 길입니다”
요한복음 14:1-7 마태복음 7:14-21
마태복음의 산상 수훈으로 알려진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께서는 이제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마음으로 암송할 수 있는 구절이 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저에게는,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믿음이 진정 무엇인지 정의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은,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예수님이 참으로 내 삶의 주님이심을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에서 저는 마태복음 7장 21절에 대한 이해를 렌즈로 삼아 요한복음 14장 6절을 읽기 원합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은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마음으로 암송할 수 있는 또 다른 구절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개신교 전통에 뿌리를 둔 거의 모든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친숙한 표현을 사용한다면, 당신은 천국에 갈 것이고, 당신은 이생 후에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이 해석에 동의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이 길이심을 믿으며, 그래서 어느 날 이 세상이 끝난 후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오직 이 길을 통하고, 믿음을 통하여, 그리고 입으로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은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오후에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점을 논하고 싶습니다. 이는 실제로 그것을 의미하지만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이 구절을 예수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 유일한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이 구절을 우리가 믿는다 라는 것의 렌즈를 통해서만 보는 것이지, 우리가 믿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의 렌즈를 통해서 보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할 때에만 우리는 이 여분의 것, 이 “더 많은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추가"는 무엇을 의미하고 "여분"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께서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에는 어떤 추가의 뜻이 있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에 있습니다. 이 문서들은 예수의 초기 추종자들의 믿음과 삶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주는 신약성서의 문서들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길'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아름답게 설명하고 있으며, 사도행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주님의 '길'의 사람들로 언급하는 구절이 무려 8절에 나옵니다.
예수님부터 시작합시다.
요한은 그 분의 길과 그 분의 일하시는 방식을 어떻게 묘사합니까? 요한복음 서두에는 예수님이 생명과 빛을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요 1:4).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물과 포도주의 기적과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떡의 풍성함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우리가 이생에서 풍요로움을 누리도록 보장하시는 분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거듭남으로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시며,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누구인지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요한복음 5장과 9장을 보면, 불구자, 눈먼 사람, 저는 사람을 만져 고쳐 주시고, 요한복음 7장을 보면, 우리에게서 생명의 강이 흐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그분은 정죄하지 않으시고, 요한복음 13장에서는, 사람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들의 발을 기꺼이 씻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그분은 우리가 그분과 살아있는 관계를 갖고 있다면 그분이 걸으신 길의 전형적인 열매를 맺게 해 주실 분입니다.
이것들은 요한이 쓴 몇 가지 예일 뿐이고(더 많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길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몇 가지 예입니다. 그분은 반복적으로 “나를 따르라. 내가 곧 길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의 신자들은 정확히 무엇을 하였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길을 따랐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세 가지 중요한 특징으로 특징지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 즉 예수님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따랐고, 서로 돌보고 보살폈습니다. 주의 만찬에서 그들은 함께 먹었고, 먹고 마시기 위해 가져온 것을 모든 사람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길을 잃고 버림받고 낙인찍힌 사람들과,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 이생에서 새 생명을 열어 주는 돌봄과 긍휼의 길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요, 이것이 그분의 방식이었습니다. 초기 신자들의 생활 방식은 분명히 예수의 생애 즉 길을 본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따르던 이 최초의 추종자들은 예수가 하신 것처럼 행하고, 그의 삶과 같이 살고, 그의 발자취를 따랐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의 '길'이라고 불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 11장 26절의 신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길을 따랐고, 예수님처럼 행하고 살았고, 예수님의 삶을 본받았고,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올바른 “것들”을 믿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을 걷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길이 참으로 구원의 길입니다. 죽음으로부터의 구원만이 아니라, 자기만 보는 죄로부터의 구원이며, 남을 배제하고 자기만을 위하여 살아가며, 남을 정죄하고 낙인 찍고, 특히 남에게 친절을 베풀지 못하는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요한에 의하면,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서 그들에게 생명(삶)을 주는 종이 되는 일을 등한히 하는 것이며, 그 생명(삶)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보여주고, 보살핌을 받고, 사랑받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경험하게 하는 생명(삶)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삶이라고 요한은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진실하게 사는 것이며, 예수님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시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볼 때 무엇을 볼까요? 그들은 우리를 어떻게 묘사할까요? '길'의 사람들로서 보고 묘사할까요?
아니면 미래 언젠가 최후의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희망만 믿는 사람들로서 볼까요? 만약 후자라면 우리는 아직도 참된 삶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얼마나 멋진 것이며,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루만 믿는다면 우리는 얼마나 궁핍하겠습니까? 우리는 참된 삶을 놓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길을 진실로 걸을 때, 우리는 참된 삶, 삶이 어떻게 지금 여기 있을 수 있는지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다른 사람들도 우리를 “길의 사람”(People of the way)이라고 부르길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