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4일
성경: 이사야 40:21-31
설교: 증인이 되는 힘
지난 주에 우리가 삶의 권위에 대해 살펴보았고, 오늘도 비슷한 맥락에서 우리의 삶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합니다. 성령께서 이 말씀을 계속 주시는 것 같습니다. 증인이 되라 라는 주제를 우리에게 주시면서 주님께서 삶의 권위, 능력에 대해 메시지를 주시는 것 같습니다.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 능력이 있어야 담대하게 증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지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8)
증인이 되라는 말씀을 하시기 전에 너희가 권능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맞습니다. 권능이 있어야 증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증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권능을 갖고 살아가는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사회적인 지위도 없었고, 돈도 없었고, 힘 있는 사람들과의 Connection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변으로 밀려난 소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담대함이 있었습니다. 밖에서 오는 힘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성령으로부터 힘을 공급 받았습니다.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낸 힘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낸 힘은 자기가 무너질 때, 같이 무너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힘은 자신이 연약해졌을 때도 우리를 지탱해주는 힘입니다.
바울 사도도 그가 증인이 되기 전에 이런 힘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하지요.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린도후서 12:9, 10)
자기가 약할 때에 강함이라는 말은 그 힘이 자기에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말은 어떤 환경에서도 자신감을 갖고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 때, 이런 힘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가 만들지 않은 힘, 자기에게 주어진 힘, 이런 힘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런 힘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힘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7-10)
이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이런 힘이 있을 때, 우리는 늘 자신을 갖고 담대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힘을 기다리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이사야는 외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이사야 40:31)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새 힘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힘입니다.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피곤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환경이 너무나 강하게 우리를 짓누를 때가 있습니다. 너무나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 아주 작아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했던 삶의 경험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갔을 때, 모든 꿈을 잃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소망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고 기다리는 그런 마음도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사야는 백성들에게서 그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런 처지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삶이 어려울 때, 그런 마음이 듭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작은 세계 속으로 도망쳐 버립니다. 숨어듭니다. 우리의 적 만이 우리를 포로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나자신을 나의 작은 세계의 포로로 만들어 버립니다.
욥이 모든 것을 다 잃고 자기의 인생을 포기하고 싶었을 때, 친구들이 찾아 왔습니다. 그들은 욥을 위로해주지는 못하고 오히려 욥에게 있는 마지막 소망도 빼앗아 버렸습니다. 욥의 마지막 소망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래도 하나님께서 나의 의를 인정하실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은 계속해서 네가 뭔가는 잘못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 아니냐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였습니다. 욥의 마지막 소망마저 앗아가려고 하였던 것이지요. 욥이 이제 하나님이 자기를 위한다는 마지막 소망도 잃어 버린채 자기의 작은 세계에 주저 앉아 버렸습니다.
그런 욥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욥 38:1-6)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는 것입니까? 욥을 자기의 작은 세계에서 끌어내시고 그에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큰 세상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을 때, 우리는 문제 속에 빠지게 됩니다. 나라고 하는 작은 세계에 빠지게 됩니다. 그 작은 세계는 문제로 가득 차 있고, 자기 동정, 분노, 실망,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는 세계입니다. 그런 작은 세계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고 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포로 생활이 어려우니 그들은 그 포로 생활에 매여서 자기 자신의 편안함만 생각했지 더 이상의 것을 바라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인간에게는 꿈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삶의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이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 뭔가 더 의미 있는 일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제가 이전에 이 인용을 여러분에게 들려준 적이 있습니다.
A ship in a harbour is safe but that is not what ships are built for.
그러나 삶이 어렵다 보면 그런 마음의 여유가 사라집니다. 사람이 작아집니다. 삶이 작아집니다. 더 큰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힘이 사라진 모습입니다. 힘이 사라질 때, 꿈이 사라지고 비젼이 사라집니다.
그러니 힘이 없이는 증인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많은 핍박과 많은 어려움을 당했지만 그것 때문에 자신의 세계 속으로 숨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더 강하게 그들은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어려운 환경도 그들은 뚫고 나갔습니다. 그들은 강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힘을 갖고 사는 모습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힘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앙망한다는 말은 간절히 바라고 기다린다는 뜻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이요 소망입니다. 앙망이라는 단어 속에는 신앙과 소망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 권능이 주어지는 것은 바로 여러분에게 신앙과 소망이 있을 때, 이 권능이 주어집니다.
지난 수요일에 아침 수요예배를 마치고 같이 Bagel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얘기하다가 6.25 전쟁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한 장로님이 어머니가 홀로 자식들을 데리고 이남 했던 말씀을 하시면서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신앙 때문에 할 수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랬더니 또 다른 한 집사님이 한국의 어머니들은 특별한 신앙을 갖고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맞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힘입니다. 신앙이 있을 때 우리의 환경은 우리에게 포기하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있을 때 우리의 암울한 현재는 우리에게 미래가 없다고 말하지만 그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미래를 내다봅니다. 신앙이 있을 때 잿더미 속에서도 꽃은 피어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무너졌을 때도 무너지지 않는 힘은 오직 여호와를 앙망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나를 무너뜨린다 하여도 신앙만 무너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런 힘을 갖고 사는 모습 그 자체가 바로 증인의 모습입니다. 증인이 된다고 하는 것이 꼭 Dundas Square에 가서 마이크를 들고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역사하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증인이 되는 삶의 모습입니다.
모든 것이 나를 에워싸고 짓누른다 하여도 넘어지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증인의 삶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통해 놀라운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증인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