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2023년 3월 12일)
로마서 5장 1-11절
“고난이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라고 19세기 스위스 철학자 Carl Hilty 는 오래 전에 말했습니다. 이 사람 이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유사한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statement
가 맞는 말일까요? 고난이 우리를 강하게 만듭니까?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Yes and No 라고 생각합니다.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World Health Organization 즉 세계보건기구의 웹사이트 첫 페이지를 보면, 전 세계 인구 중 여덟 명에 한 명은 mental disorders, 정신 질환을 경험하며 살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불안 및 우울 장애가 가장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근대사에 인류에게
일어난 가장 혹독한 환란인 코빗이 있지 않았습니까?
코빗이 발생하자마자, 정신 질환이 28 퍼센트나 증가했다 라는 것입니다.
어제는 코빗이 팬데믹으로 선포된 지 3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사회 현상 속에서 눈에 띄는 것은, 청소년들의 범죄와 폭력입니다. 코빗 기간동안 몸은 컸지만,
사회성도 결여되고, 감정 조절의 방법도 배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일련의 청소년들이 떼로 몰려 다니면서 TTC 직원들에게 폭력을 가하기도 하고, 브램턴 지역 학교들에게 총격을 가하겠다는 위협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17살 짜리 여학생과 14살 짜리 남학생이 기소되기도 했습니다.
고난이 우리를 강하게 만듭니까? 이런 것을 보면 그렇다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고난이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라고 할 때에,
그래서 강함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생각 속에 자리잡고 있는 강함이라는 개념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은 어떤 모습일까? 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많은 경우에, 고난이 사람을 강하게 하기 보다, 강퍅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둘이 겉
모습은 비슷해 보여도, 그 안과 내용은 상당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볼 수 있는 또 다른 대조가 있습니다. 삶의 고난과 역경이, 어떤 사람을 망가뜨리고,
아프게 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경우에는 강퍅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이 다른 것 같지만, 동일하게 훼손이 일어난 것입니다. 강퍅하게 될 때에,
겉으로는 이겨낸 것 같지만, 더 많은 것을 상실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나치게 구두쇠가 되거나,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부정적이 되어서, 매사에 호전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강한 모습이 표면적으로 있지만, 오히려 속으로 두려움에 가득 차 있는 것 아닙니까?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에, 고난이 이 사람을 강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강퍅하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사람마다,
경우마다, 고난을 경험한 후의 모습이 달라지게 될 것인데, 무엇이 그 구분점이 되고 요인이 되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어느 누구도 고난을 경험하면서 강퍅해지는 자기 자신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터이니
말입니다. 어느 누구도 고난을 경험하면서 망가지고, 쓴뿌리가 깊어지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터이니 말입니다.
오늘 본문도 환난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환난 때문에 망가지거나, 강퍅해지지 않을 수 있는 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3절과 4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우리는 줄 앎이로다” (롬 5장 3-4절)
환난을 영어성경은 suffering 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고난이고 괴로움입니다.
3절과 4절의 일부분
밑줄 친 부분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suffering produces endurance, endurance produces character”
환난이 연단 즉 character 를 만든다 라는 말은, 우리가 처음부터 언급하고 질문하고 있는 “고난이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Character 라는 말은, 한 사람의 됨됨이로서,
어떤 성품과 특성을 뜻합니다. 환난이 그 사람의 존재를 강하게 만들었다 라는 것입니다. 원어를 보니, 환난이 와도 그 사람은
test 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고난의 상징적인 인물인 욥이 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 23:10)
그런데 고난이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구분점이 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소망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음을 보게 됩니다. 소망이 없이 고난을 통과한 사람은, 강퍅해지거나 망가지게 될 뿐입니다. 반면에, 소망과 함께 고난을 통과한 사람은, character 가 생겨서 진정으로 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망은, 우리 스스로 갖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생각에
희망적인 것들로 내 자신을 준비하거나 갖춘다고 소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바램일 뿐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절대로 불 같은 환난을 통과하게
하지 못합니다.
소망은, 오직 신앙의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오늘 본문 6절로 10절을 보면, 우리 신앙의 근거와 내용이 나타나 있습니다.
6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그리스도께서…죽으셨도다”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10절: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은, 우리의 현실을 뛰어 넘는 참된 소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연약하고,
죄인이고, 원수인 우리들을 구원하셔서, 강하고,
의롭고, 친구 삼아 주신, 이 십자가의 은혜를 진정으로 의지하고 믿는 자들에게는,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는 소망이 주어진다 라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구체적인 구원의 역사를 믿으십니까?
화요성경공부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깊이 깨닫고 풍성하게 만나는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깊어지고 확고해지고, 우리의 헌신이 풍성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자들은,
환난이 오더라도, “올테면 와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3절 말씀의 뜻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3절)
한글 번역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환난이 와서 기쁘다 라는 말이 아니라, 환난이 올지라도 기쁘다 라는 말입니다. 영어 성경은,
그래서 “즐거워하다”를 boasting
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자랑한다 입니다. 올 테면 와라,
라는 자세와 성품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만 소망을 둔 사람들은, 환난을 당할 때에 자기 자신의 불순물들이 다 태워지고 벗겨져서, 정금처럼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 나에게만
고난이 임하는가 질문하기 보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도우심을 구하게 됩니다. 그것이 소망의 사람이 되어가는 모습입니다. “환난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연단이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교우 여러분, 그저 환난을 참거나,
이겨 내려고만 하지 마십시다. 내 자신을 의지하지도 마십시다. 오히려 망가지고 강퍅해질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 환난이 임할 때에, 십자가를 묵상하십시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다. 십자가에서 흘러 넘치는 소망으로, 환난을 통과하십시다.
히브리서 기자도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예수)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히 2:18)
내가 의지하는 모든 것들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 소망이 더욱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 불 같은 시험도 어쩌지 못하는 소망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 16:33)
여러분들은 “소망의 사람들”
입니다. 아멘! 이 세상이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소망의 힘으로, 그 어떤 환난도 통과하셔서 정금과 같이 나오시길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