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20일
성경: 시편 46편
설교: 잠잠하라, 쉬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그런데 이 가만히
있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지금
유럽에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안에도 전쟁이 있습니다. 세상은
혼란 속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도
많은 혼란이 있습니다. 폭풍은 밖에도
있고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는다 해도 실상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갈등이 있고, 불편함이 있고, 걱정과
염려가 우리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이 가만히
있기를 싫어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우리
속에 있는 어두움과 갈등, 이런
것들이 올라오고 그것들을 직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꾸
바쁘다는 핑계로 그것들을 피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시선을 다른데로 돌립니다.
가만히 있을 시간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불편하기 때문에 가만히
있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가만히
있는 것을 어떻게 하는지도
알지 못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열등감, 연약함, 어두움, 부족함, 그대로 안고
살아갈 뿐입니다.
Feeling good 이 이런 것들을
직면하는 것보다 좋으니 그저
feel good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가만히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가만히 있기
위해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합니다. 무슨
믿음이 필요합니까? 처음에 시편 기자가
고백했던 그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46:1-3)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2001년 911 사건이
터지고 우리는 이 구절이
많이 인용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온 세상이
깜짝 놀랐습니다. 미국은 말할
수 없는 아픔과 갈등을 겪으며
혼란 속으로 빠졌습니다. 악과 어두움의
세력이 개인의 삶을 침략하고
짓누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개혁자인 마르틴 루터도 악과
어두움의 세력이 사람들을 짓누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1527과 1529년 사이에
이 시편을 사용하여 찬송가를 지었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내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이땅에 마귀들 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악의 세력이 판을 치는
환난과 혼란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도움을 주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 세상에 전쟁이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시편 46:9)
산이 흔들리고 바다가 뛰놀아도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믿음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우리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우리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합니다. 늘 뭔가를
만들어 내는, 생산성이 있는
삶을 중요하게 여기지 가만히 있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효과적이고, 생산적이고, 능률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이 세상은 강조하고 가르쳐
주지만 가만히 있는 것을
중요시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저 생산을 해나가는 기계처럼 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세상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갈아 치울 수 있는
기계를 만들기를 원합니다. 나는 기계가
아닙니다. 나는 로보트가 아닙니다.
물론 요즘에는 이 세상
기업에서도 조금 가만히 있는
것을 중요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훈련시키는 세미나를 하고, 집중하는
훈련을 하고, Meditation의 중요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한 사람이
더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말입니다.
한병철 이라고 하는 교수가
있습니다. 이 분은 독일에서 교수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Sabbath rest does not follow creation; it brings
creation to completion.
안식일이 창조를 뒤따랐던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창조를 완성시킨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만드신 것은
할 것이 없어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만드신 모든 것을 완성시키시기
위해 안식일을 만드셨다고 그는
말합니다. 안식일의 중요성을 우리 인간이 회복해야 합니다.
유대인 학자인 Abraham
Heschel이 말한 것과 비슷합니다. 그는 그의
책,
안식일에서 안식일이 6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6일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쉼이라고 하는 것은 인생의
완성입니다. 이 쉼의 중요성을 잘 알아야 합니다.
스탠포드 대학에서 가르치시는 또 다른
한국인 학자, Alex
Soojung Kim Pang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쉰다는 것을 그저
일의 absence,
부재라고 생각하지만 쉰다는 것은
그저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쉼이라고 하는
것은 나름대로의 고유한 특성을
갖고 있다.
만약 일하는 것이 당신을
정의한다면, 일을 하는 것을 그칠
때,
당신은 무엇입니까, 누구입니까?
쉰다는 것은 일하는 것의
반대되는 적이 아니라 쉰다는
것은 일하는 것의 파트너이다.
그들은 모두 쉬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쉰다는 것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의
완성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죽음을 보는 눈입니다. 자기의 친구, 나사로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요한복음 11:11)
“Sleep
is a short death and death is a longer sleep.”
잠자는 것은 짧은 죽음이고
죽음은 좀더 긴 수면이다.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날 때, 우리의
삶을 완성시키는 것은 쉼이다. 영원한
쉼이다.
우리와 신앙 생활을 같이
하던 김경진 권사님이 지난
화요일 소천하셨습니다. 월요일에 방문하여
임종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돌아가셨습니다. 좋은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영원한 쉼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의 삶이
완성된 것입니다.
쉰다는 것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의 스위치를
꺼버리고, 무감각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쉰다는 것은 그저 육체적으로
break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쉰다는 것이 바로 오늘
말하는 가만히 있다는 것입니다. 쉰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병으로 시달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진정으로 인간이 하나님께서 주신 쉼을 누리지 못합니다. 가만히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가만히 있기 위해,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분주하기만 했지 마음의 평화, 고요함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예수님에게 온다고 하는 그 자체가
믿음입니다. 그냥 예수님께 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어야 예수님께 오는
것입니다.
요한은 온다는 것을 그렇게
보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37)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요한복음
6:44)
여러분이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믿음을
갖고 있다면 쉼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여러분이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다. 잠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기 계시며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을 알게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피난처요 힘이시라는 것을,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는 것을
알게될 것입니다.
산이 흔들리고 바닷물이 뛰논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가만히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성난 파도가 잠잠해질 것이고
하나님의 성을 기쁘게 하는
하나의 시내가 될 것입니다.
4절은
아주 재미있는 구절입니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시편 46:4)
예루살렘에는 강이 없습니다. 그런데 시편기자는
거기에 강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상상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성난 파도가 여러분 속에
거품을 품고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잠잠해질 것이고
여러분을 기쁘게 하는 잔잔한
강물이 될 것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