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2022년 1월 16일)
이사야 43장 1-7절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는 safety, 즉 안전을 늘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Safety를 위해서, 모든 활동을 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이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safety 를 최우선으로 두고, 위험한 상황에 놓이지 않으려고 예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믿고 의지했던 safety 가
무너지기라도 하면, 우리는 금방 두려움에 빠지면서 그 두려움의 상태가 싫어서, 어떡하든지 또 다른 safety 를 구축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민자들이 타지에 이주하며 사는 것도, 이 safety 를 위해서 입니다. 더 나은 삶을 이루고,
자녀들에게도 그런 삶을 보장해 주려고, 이민와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safety 가 최우선이 되어서 살다 보면,
그것이 전부인양 살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더 중요한 것들을 놓치며
살게 된다 라는 말입니다.
이민자의 현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경제적인 safety 와 사회적인 safety 를 어느
정도 이루어 놓을 수는 있겠지만, 기존 사회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많은 경우에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한계를 지어 놓고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Safety, 안전함이 모든 것이 되어 버릴 때에, 우리는 안주하게 되고, 그 안주 속에 숨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의 변화나, 새로운 것에 대해서 마음 문을 닫게 되고, 눈을 감아버리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대해서, 더 알려고 하지도 않고 참여하지도 않습니다.
정치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투표율이 낮습니다. 단지 안전함과 편안함이라는 것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를 오히려 속박하고 포로되게 한다 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들어야 하는 대상도 마찬가지 처지에 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을 한 지 수 십년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나라를 잃고, 땅을 잃고, 성전을 잃고, 가족들도 뿔뿔히 흩어졌는데,
그 아픔과 상실감은 세월이 지나면서 아물고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다 사람들은, 바벨론 문명의 찬란함과 보장된 자유로 인해서, “바벨론 포로”라기 보다, 바벨론에 흡수되고,
적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서 살아가는 타지인이었지만, 어느새, 안주하고 정착하고, 익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을 보면서, 산상변화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몇과 산 위에 올라가서 변화되었을 때에 베드로가 한 말이 연상이 됩니다.
마태복음 17장 4절입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마 17:4)
산 아래로 내려가서 해야 할 일들이 있는데도, 그것을 망각하고 산 위에서 경험한 황홀함에 매료되어 안주하려는 베드로나, 바벨론에 살고 있는
유다 사람들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느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safety
를 구축하고, 정착하면서, 익숙함과 편안함에
젖어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상황에,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복귀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말하면
바로 그것입니다. 너희가 살고 있는 곳은 본향이 아니다 라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 곳을 재건하고 나에게 예배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너희를 향한 나의 뜻이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Safety 를 추구하고, 안주하고, 익숙함과
편안함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울타리를 뒤로 한채, 길을 나서는
일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Safety 를 넘어서서, unsafe 한 곳으로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Safety 를 악착같이 붙든다 라는 것은 그만큼 두려움이 크다 라는 반증입니다. 지금 내가 길을 나선다고, 그 광야를 다 횡단할 수 있을까? 염려하게 될 것입니다. 그 여정에, 맹수의 위협, 굶주림의 위협,
적들과 원수들의 위협은 어떻게 될 것인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이샤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1절)
-
“Do not fear” 라고 영어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각 단락의 첫번째 말씀이 바로, “두려워하지 말라” 입니다. 1절과 5절에서 각각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두려움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면서
2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2절)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라는 약속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니, 안전을 떠나 광야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복귀하라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여정에, 물의 위협, 불의 위협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약속하신 것은 그러한 역경에서도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Conquering
Fear 라는 책을 쓴 Harold Kushner 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When we pray, we don’t ask God for anything. We ask God for God.
우리가 기도할 때에 아무것도 하나님께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되시기를 간구합니다.
문제와
어려움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 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서,
우리가 문제와 어려움을 새로운 눈으로 보고, 그것들을 다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광야에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지만, 최근에 어떤 교우께서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면회가 허락되지 않아서 수술 받기 전날 전화를 드려서 전화로 기도해 드렸습니다. 그때에도 기도한
것이 동일합니다. 하나님, 이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할 수 있도록 힘
주시고 평강으로 감싸주세요. 라고요.
그 분은 홀로 광야를 지나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수술이 잘 마쳐졌고, 중환자실로 가지 않고 회복실로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유다 백성들은
광야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진정으로 회복되어지는 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익숙함과 편안함이라는
현실을 뒤흔들고, 길을 나서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향하여 오늘 말씀하실 때에, 두려움에 있는 그들을 나무라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고,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왕으로 군림하고 다그치지 않고, 마치
사랑하는 연인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매우 가까이에서 손을 붙잡고
함께 걸어가시는 것만 같습니다. 4절을 보면 그런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오늘 본문은
학자들에 의하면 일명 Second Isaiah (40-55장)에 속합니다. Second Isaiah 의 첫부분인 이사야 40장 1-2절을 봐도, 하나님이 회복을 명하며 시작하셨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사 40:1-2)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이 또 한가지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말씀하실 때에, 이인칭 단수로 부르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너” 라는 단어는 이인칭 단수입니다. 이 말은,
유다 백성 전체가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서, 예루살렘으로 복귀하기를 바리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누구도 예외가 없다 라는 말입니다. 너희 모두가 나의
자녀이고, 백성이다 라는 말입니다. 더 이상 정죄함도 없고,
판단도 없으니, 길을 나서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5절과 6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5-6절)
어떤 한
사람도 낙오없이, 모두 하나의 공동체로 돌아오기를 바라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코빗의 장기화로 인하여, 우리는 고립되고, 공동체에서
멀어지는 안타까운 현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런 가운데서도 safety 를 찾고, 익숙하게 되고 안주하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현실에 적응하고, 그 적응된 것이 또다른 습관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어떻게 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여러분들의
신앙은 어떠십니까? 여러분들의 영혼의 상태는 어떠십니까? 안주하고 편안함에 속지 마십시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핍절하게 만드는 감옥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오늘 본문 6절에서 감옥에서 그 포로된 것에서부터 끌어내시고자 함을 볼 수 있습니다.
내놓으라, 가두어 두지 말라, 이끌며,
오게 하며 합니다.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다시 일어서십시다.
그래서, 우리를 묶어놓고 속박하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힘든 광야라 할지라도, 그길을 나섭시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여정에 함께 하여 주실 것이고, 본향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때로는 go beyond 하려고 할 때에, 저항을 경험할 것이고, 실패와 좌절을
경험할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너는 두려워말라”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붙잡읍시다. 그래서 오뚜기처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서, 광야의 길로 나갑시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우리는 예배공동체로 회복되고, 거듭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