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2021년 10월 3일)
시편 8편
“사람이 무엇이기에”
오늘 본문인
시편 8편은, 다윗의 시편이라고 하는데, 마치 그가 들에서 양을 치면서,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세계를 보며, 하나님을 찬양했던 시었으리라 짐작하게 합니다. 오늘 시편 8편에는 제목이 따라오는데,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노래 라고 합니다. 깃딧은
하아프 입니다. 다윗은 하아프를 연주하면서 오늘 시편을 노래했을 것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니, 다윗은,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시편 처음과 마지막 절에서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감격하여 높이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1절,
9절)
이처럼, 오늘 시편에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뜻을 깨닫고 있으며, 또한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받들겠다는 고백이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류를 향한 뜻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4절로 6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시 8:4-6)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겸손함을 보게 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천사들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는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워 주셨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을 다스리게 하셨다고,
고백하는 것은, 오직 겸손에서 비롯된 고백입니다. 도대체 내가 누구인데, 이처럼 고귀한 사명을 맡겨주시고 있는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연세계를 보면서,
아무나 다윗처럼 고백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연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시편으로
노래하며 찬양했던 다윗과는 달리,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지도 못하고, 아무런 이해나 감사가 없을 수도 있다 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 아름다운 자연을, 그저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고, 착취하고,
그래서 훼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기후변화에
대해서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을 줄로 압니다. 세계곳곳에서 기후변화 때문에 발생하는
자연 재난으로 인해서, 이 지구는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몇 달 전 브리티쉬 콜롬비아에서는 Heat Dome 으로 인해서 445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하여, 폭염의
공기층이 장기간 머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후변화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우리 인간이, 자연을 보존하지 않고, 착취하고 훼손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더 가지려고 하고, 더 축적하려고 하고, 더 사용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다윗이 자연을 보며, 그 아름다움을 보면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노래했는데, 그는 또한, 이 아름다운 자연을,
인간에게 맡기신 하나님을 또한 발견하고 노래했던 것입니다. 6절에서
말하는 “다스리게 하시고” 라고 한 것은, 착취와 훼손의 의미가 아니라, 돌보고 보살피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아름다운 이 세상을 잘 돌보고 보살피는 사람은,
신앙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깊이 깨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자연을 돌보지 않고, 착취하고,
훼손한다면, 그것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아름다운
자연을 잘 관리하고 보존해야 합니다.
그것의 가장 첫걸음이 되고, 구체적인 것이, recycle, reduce, reuse. 이 세가지 입니다. 리싸이클은, 쓰레기를 분리수거하는 것이, Reduce는 쓰레기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고, Reuse는 모든 것을 다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가져야 하는 삶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쓰레기 분리 수거는, 하찮은 일이 아닙니다. 보잘 것
없는 일도 아닙니다. 신앙으로 바라보고 이해하고, 각성해야 합니다.
정부에서 돈을 들여서라도 시행하는 중요한 프로그램입니다. 작은 일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은, 아직 크지 못한 사람입니다.
나 한
사람이 이런
것들을 실천하지 않는다고 무슨 큰 일이 일어날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큰 일이 일어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나 한 사람 쯤이야” 하는
생각에, 모두가 그렇게 무관심하게 행동한다면, 우리 모두는,
함께 무너질 것입니다. 우리 세대만이, 이 자연을 보고,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고백하게 하지 말고, 우리의 자손들, 후손들도, 동일하게,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고백할 수 있는 세상이 되길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자연보호만을 말하고 있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만드신 만물 중에는,
우리 사람들도 들어 있습니다. 갖가지 피부 색깔과 언어와 문화를 가진 모든 사람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한 인종이,
다른 인종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신앙인의 태도일 수가 없습니다. 히틀러
당시, 독일이 유태인들을 학살할 때에 독일의 교회들은 침묵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본회퍼 목사같이 의식이 있는 사람들이 저항하였던 것입니다. 한 인종이 다른 인종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이 된 모습입니다. 착각이요, 오산이요 교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에,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하는데,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이 아니고,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높이 세우셔서, 당신이 만드신
이 아름다운 세상과 만물을 잘 돌보라고 맡겨주신 것입니다.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 라는 것은,
하나님과 깊이 연결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라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깨달을 때에, 우리 안에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충성이 끓어 오르는 것이고, 맡겨주신 것들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멘 넥타이는 오렌지 컬러 입니다. 며칠 전 9월 30일은, 캐나다에서 제정한 National Day for Truth and
Reconciliation 이었습니다. 그리고 9월 30일은 원래 Orange Shirt Day 이었습니다.
2013년부터 이 날에는 모든 학생들로 하여금 오렌지 색깔의 옷을 입고 등교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 유래는, 1973년에 Phyllis Webstad 라는 원주민 소녀가 처음으로 Residential school에 갔을 때에 오렌지 색깔의 옷을 입고 갔는데,
가자 마자 학교 측에서 옷을 벗기고는 교복으로 갈아입게 한 것에서부터 유래 되었던 것입니다. 옷 하나가 아니라, 그녀의 정체성, 그녀의 문화,
그녀의 존엄성 모두가 발가벗겨진 참담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분은 아직도 생존해 있습니다.
우리가 원주민들의 아픔과 상처를 가히 짐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을 함부로 정죄하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필리스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갔지만, 언어를
잃어 버렸고, 그래서 부모와도 대화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더 힘든 삶을 살게 되었다고 그녀는 이야기합니다.
올해 6월초에는, Kamloops BC 에 있는 residential school 야드에서, 표식이 없는 무덤 215개가 발견 되었는데
원주민 어린아이들의 것이었습니다. 얼마 안되어서 사스카츄완에 있는 residential
school 에서도 751개의 표식이 없는 무덤이 발견되었습니다. 거의 모두 원주민 어린아이들의 것이었습니다. 집에 다시는 돌아가지 못했던 어린 아이들…결핵에 걸리고 장염에 걸리고 영양실조에 걸려서 죽어야 했던 어린 아이들이었습니다. 아이를 둔
부모 입장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죽었다면 어디에 묻혔는지도 몰랐으니 말입니다. 표식이 없는 무덤들이 발견되면서,
사회 전반에서는 어떠한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켜졌고, 의회에서는 9월 30일을 National Day for Truth and
Reconciliation 을 제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진실을 밝히고,
그들의 아픈 이야기들을 듣고 배우고, 이에 대한 적절한 회복의 조치들을 구체적으로
해 나가자는 것입니다.
한 인종이
다른 인종을 억압하고 탈취했습니다. 이 Residential 학교들은
모두 크리스천 교회들이 정부로부터 위임받아서 운영했다 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본인들이 하는 일이 옳다 라고 여겼던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통해서,
우리 또한 매우 심각하게 우리의 삶의 태도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 절대화 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혹시 인종차별, 성차별, 연령차별 등이 우리의 삶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러한 태도는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고,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교회에서는 2005년부터 권사님들이 성찬 배분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2008년에는 첫 여성 장로님을 세울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교회의 중심사명
중에는 “연약한 자와 함께 하는 교회” 라는 중심사명이 있습니다.
이 중심사명의 정신은 solidarity 입니다. 연대입니다. 함께 하는 것 자체에 가장 큰 의미를 두는 것입니다. 1세와 2세가 함께 하고요, 연약한 자와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내가 하나님이 아니다 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시고, 지금도 역사하시는데, 우리의
함께 함을 통해서, 혹시라도 회복과 치유를 가져다 주실까, 기다리며
기도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물질적이고 정치적인
힘을 얻기 위함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속성인, 정의와 평화와 사랑을 우리 삶 가운데 가장 중심에 두고 반영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만약, 여전히 힘의 원리, 세상의 원칙에 따라 살고 있다면
각성해야 합니다. 아니, 회개해야 합니다.
지난 수요예배에서
들은 것처럼,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려서 회개한 삼천명 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베드로 자신도 엄청난 변화를 직접 경험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정결하고 무엇이 정결하지 않는 것이라고요. 그러나, 환상 중에 하나님이 보여주셔서 그는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는 음성을 듣고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속성인 정의, 평화, 사랑 등이 가득차고 반영이
되고 있음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요, 하나님의
창조하신 이 세상을 잘 돌보고 보살피라는 귀한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에이전트이고 엠베서더
입니다.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는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억압과 착취와 분쟁이 있는 곳에, 그래서 고통과 외로움이 있는 곳에,
치유와 회복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히 연약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며,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그들과 연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연약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가지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봐도, 하나님께서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 그러니까 그들의 기도와 찬양을
통해서,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2절입니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2절)
우리가
연약하고 소외된 자들의 자리에 찾아가서 함께 할 때에, 연약하고 소외된 자들의 입에서도,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라는 찬양이 울려
퍼지게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