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11일
성경: 마가복음
6:14-29
설교: 두려움을
극복하는 힘
우리에게 꼭 필요한 힘은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이 질문을
제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나에게 꼭 필요한 힘은 무엇인가? 어떤 힘이 진정으로 나를 행복하게 하고 나의 삶을 의미 있게 해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내가 꼭 가져야 할 힘은 무엇인가?
제 결론은 나에게 필요한 힘은 바로 두려움을 이기고 극복하는 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만 있으면 우리는 인생을 행복하게 그리고 의미 있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다른 힘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두려움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힘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힘입니다. 이번 Pandemic이
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그럼으로 많은 사람들을 공포로 몰고 갔습니다. 이 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갔습니다.
우리의 삶에 아주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저 상상 속에 있는 두려움이 아니라 진짜 두려움이었습니다. 7월 9일짜로 이
바이러스로 죽은 사람들이 4백만 2만 5천 765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바이러스만이 우리 안에 두려움을 조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은 우리 모두가 매일 우리의 삶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두려움은 우리의 삶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물론, 두려움 가운데는 현실에 맞지 않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거미를 보고 두려워하고, 높은데 있으면 안전한데도 두려워하고, 공황장애도
있고, 등등 자기 상상 속에 있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실제적인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두려움,
건강에 대한 두려움, 자식에 대한 두려움, 예기치 못하는 사고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등 여러가지의 두려움이 우리 속에 있고 이것은 우리의 상상 속에
있는 두려움이 아니라 실제적인 두려움입니다.
무엇을 하던 우리는 이런 두려움의 현실을 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보통 하지 않던 실수도 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지금 한창 Euro Cup 축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COPA America도 진행중에 있습니다. 오늘 이탤리와 영국이 결승전을 합니다. 또한 Wimbledon Tennis가
진행되고 있고, 우리 캐나다인인 Shapovalov 선수가 아깝게도 준결승전에서 탈락했지만 아주 잘했습니다. 저도 다 보지는 못했지만 여기 저기서 축구, 테니스 경기를 보았습니다. 그 경기를 보면 그들이 보통 하지 않던 실수를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하는 것을 봅니다. 왜 그렇습니까? 두려움이 밀려왔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두려움이 그들을
사로잡았을 때, 그들은 쉬운 것도 해내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스포츠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두려움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 우리는 실수를 합니다. 올바른 생각과 결정을 하지 못합니다. 이 판데믹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생각의 실수도 하고,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봅니다. 두려움과 고립이 함께 그들에게 밀어닥칠 때, 그들은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두려움을 다루는 것을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자신의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두려움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없애려고 할 때에, 우리는 denial 속에
빠지게 되고, 현실을 부정하게 되고, 그것은 두려움보다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옵니다. 상황에 따라 일어나는 두려움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두려워 하는 것 -
괜찮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두려움을 다뤄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들이 배워야만 했던 것이었습니다. 마가는 그의 메시지를 아주 창조적인 방법으로 전하는 것을 봅니다. 마가는 오늘의 이야기를 제자들이 Mission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그 사이에 끼어 집어 넣었고 지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이전에 일어났던 사건을 회상하는 것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13절: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6:14-29: “세례 요한의 목이 베이는 이야기 “
30절: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세례요한의 이야기가 제자들이 선교에 나가 경험한 것과 그것을 예수님께 보고 하는 그 사이에 끼워 집어 넣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실 때,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자기의 힘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힘에 의존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였습니다. 이런 힘을 평생 그들은 경험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해낸 것입니다. 그때까지 모든 일은 다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들은 그저 구경만 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13절: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경험하였고, 병자들을 고치는
치유의 능력을 경험하였습니다. 한번도 이런 능력을 본 적도 없고 경험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너무 신기해서 그것을 흥분하며 예수님께 보고했던 것입니다.
30절: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그리고 그 사이에 요한의 목이 베이는 사건을 마가는 집어 넣고 있습니다. 마가는 이 샌드위치 방법을 여기 저기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구조를 통하여 마가가 얘기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왜 하필 세례 요한의 목베이는 이야기를 그 사이에 두었을까요? 마가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는 힘보다 더 큰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두려움을 이기는 힘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례 요한이 갖고 있었던 힘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병자를 고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죽음의 두려움마저 그를 무릎 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는 그런 힘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6:14-29절은 긴 구절입니다. 우리는 헤롯에 대해 듣고,
그의 아내에 대해 듣고, 또한 헤로디아의 딸에 대해 듣습니다. 이 이야기는 세례 요한의 이야기인데 이상하게 세례 요한은 아무 말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그에 대해 듣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고요함이 바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생명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헤롯을 설득시키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있는 모습 그대로 있을 수 있는 힘을 그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Live out who he was. 그는 광야의 소리였고 그의 일을 잘 마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감옥에 갇히는 일과 죽음이 그에게 찾아왔을 때, 그는 묵묵히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감옥에 갇히는 것과 죽음이 그를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헤롯은 달랐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파워를 다 갖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도 죽일 수 있는 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겁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두려움 속에 빠져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두려움이 그를 삼켜 먹어 버렸습니다. 그가 예수님에 대해 들었을 때, 그는 두려웠습니다. 자기가 죽인 세례 요한이 살아나서 예수로 나타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살인자는 자기가 살인한 사람을 두려워 합니다.
“헤롯은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마가복음 6:16)
그는 요한을 두려워했습니다.
살아 있을 때도 그를 두려워 했고 그를 죽였을
때도 그를 두려워 했습니다.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을 죽이게 된 것도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눈총이 두려워서 죽였던 것입니다.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마가복음 6:26)
어린 소녀에게 모든 것을 주겠다고 약속했던 그 어리석은 약속 하나를 지키자고 사람을 죽입니까? 얼마나 비겁한 사람입니까? 오히려 그 아이를 가르쳐서 그가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 되었는가를 얘기해 주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헤롯은 이 세상의 모든 힘을 갖고 있었지만 자기 자신의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없었습니다. 그는 좋은 인생을 살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없다면 우리는 좋은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제자도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도는 우리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늘 본문을 보면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였지만 그들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아직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그들은 두려움 때문에 다 도망쳤습니다.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끝에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진리에 끝까지 순종하였습니다.
진리가 우리 속에 살아날 때,
두려움은 우리 속에 있을 자리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32)
그냥 진리가 아니라 우리가 아는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진리가 우리 속에서 살아날 때 라는 뜻입니다. 이 진리가 우리를 두려움에서 자유케 할 것입니다.
제자도라고 하는 것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도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여정입니다. 그런 면에서 제자도라고 하는 것은 어떤 국한된 사람들에게 제한된 것이 아닙니다. 제자도는 모든 사람들의 lifestyle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좋은
lifestyle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그것이 바로 바울사도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로마서 8:31-34)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가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더이상 우리를
고발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누가 우리를 고발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는데, 하나님께서 괜찮다고 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대적합니까?
우리는 두려움에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처벌의 두려움, 실패의 두려움, 거절의 두려움,
죽음의 두려움에서 말입니다.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우리 자신의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더이상 두려움 속에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례 요한이 살았던 삶이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사셨던 삶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이야기나 예수님의 이야기는 그들이 끔찍한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이 어떻게 두려움의 힘에 굴복하지 않았느냐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이 어떻게 두려움의 힘을 정복했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알면서 얻게 되는 가장 큰 축복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두려움의 힘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힘이 우리에게 있다면 이 세상에 있는 어떤
도전도 우리는 다룰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 가면서 더 큰 힘을 얻게 될 것이고 그 힘이
우리를 온전히 두려움에서 자유케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