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4일
주일
성경:
마가복음 2:2-9
설교:
영광이 우리를 둘러쌀 때
오늘의 이야기는 매우 황홀한 광경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 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습니다. 죽은 지 오래 된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났는데 그저 어떤 모습으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더불어 대화를 하였습니다.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아주 놀랍고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늘 경험하는 그런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언어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을 예수님의 세 제자들은 경험하였습니다. 나중에 베드로가 자기가 그 산에서 경험한 것을 편지로 썼는데 거기에 나오는 단어를 보면 이런 단어들이었습니다. “영광”, “존귀”, “거룩” 자기가 찾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단어를 사용해서 그때의 경험을 묘사하려고 하였던 것이겠지요. 불행하게도 그 자리에서
실제로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우리들은 그런 단어들을 통하여 그가 경험했던 것을 그대로 경험하지는 못합니다. 제자들이 경험한 것은
“참 좋다” 라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라고 말은 하였지만 6절을 보면 이렇게 마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마가복음 9:6)
좋기는 좋은데 무섭고, 무서운데 좋고, 인간의 말로는 자기들의
경험과 감정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설명할 수 삶의
신비를 경험할 때, 우리 인간이 보여주는 반응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들은 진실로 삶의
신비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보고 경험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내가 알고 있는 언어와 논리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표현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저에게는 참
위로가 됩니다. 우리의 언어와 논리로 다 설명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기대할 것도 없습니다. 힘 있는 자는 늘 그
힘을 사용하여 힘 없는 자들을 짓누를 것이고, 강한 자는 늘 약한 자를 무시하며 그들을 사용할 것입니다. 돈이 없으면 무시를
당하고 힘 있는 사람들과 다르면 차별을 받습니다. 아프면 날 소망이 없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꼭 그렇게 돌아가지만은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힘이 불의한 자를 치고, 연약한 자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도 일어납니다. 아픈 자가 치유를 받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그것을 그저 보지 못할 뿐입니다. 예수님도 도마에게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네가 보는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오늘의 본문은 “엿새 후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영화를 볼 때, 가끔 이런 방법을 쓰는 것을 봅니다. 일년후 혹은 일주일
후에 라고 말하면서 영화를 시작합니다. 그 말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일이 일년 전, 일 주일 전의 사건과
연결이 된다는 뜻입니다. 마가가 “엿새 후”에 라는 말을 썼다는 것은 오늘의 이야기와 엿새 전에 일어났던 일이 연관이 있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엿새 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엿새 전에 예수님은
빌립보 가이사랴에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을 하시고 그 다음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엿새 후에 그
산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옵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마가복음 9:7)
오늘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누구냐에 관한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뜻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 God’s presence, 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 베드로가 왜 초막 셋을
짓고 거기에 있자고 하였습니까? 이 초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이 임재하고 있다고
믿었던 성막, Tabernacle 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구름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기 전에 하나님의 임재를 그는 느끼고 즉각적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초막을 짓고 거기에 있자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Dwelling place 라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말하였지만 그는 그것을 느꼈습니다.
그게 베드로 입니다. 많은 경우에 베드로는
자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깊이 알지 못하면서 말하였습니다. 엿새전에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제자들에게 물으셨을 때, 아무도 답을 하지 못했으나 베드로는 답하였습니다. 물론 자기가 무엇을
말하는지 몰랐지만 말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마가복음 8:29)
깊은 뜻을 알지 못했지만 그는 느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예수님과
통했었습니다. 연결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를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그 산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몸으로 즉각적으로 느꼈기 때문에 초막을 짓고 여기 있자고 말했던 것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그의 복음서에서 세번에 걸쳐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것처럼 산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백부장의 입을 통해
나옵니다.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마가복음 15:39)
하나님이 선언했던 것으로 시작하여 인간이, 그것도 선택받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의 입을 통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임재라는 것이 선포되었습니다. 성전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선포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그 산에서 짓고자 했던 장막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외치셨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버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 바로 계셨습니다. 이 세상의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거기 계셨습니다. 우리가 고통 받는 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왜 나를 버리셨는가 하고 질문을 할지 모르나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계십니다. 내가 멸시받고 조롱
받고 버림을 받는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산상변화는 참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이고
황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늘 경험하는 삶의 모습은 아닙니다. 또한 한 순간의 영광을 누릴 때는
있지만 그것은 그저 일시적인 경험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베드로가 초막을 거기에다 짓자고 말한
것은 그 일시적인 것을 영구화 시키자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경험하는 것은 산상변화의 경험이라기 보다는 십자가의 경험입니다. 늘 도전이 우리를 찾아오고, 삶의 문제가 우리를
어둡게 합니다.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걱정과 근심이 있고 그것 때문에 또한 우리는 두려움 속에 살아갑니다. 죽음의 두려움이 우리를
짓누릅니다.
그러나 어려움 가운데서도 우리는 올바른 것을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고통 가운데서도 우리는
믿음을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아픔이 있지만 가르고 등지기 보다는 치유를 가져오려고 하였고 하나가 되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십자가
였고 또한 우리가 지고 가야할 십자가 입니다.
우리가 힘을 얻는 것은 산상변화에서 보여주었던 예수님의 모습이 이제
바로 그 십자가에서 보여졌고, 바로 그 십자가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앞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멸시 받고, 오해를 받고, 미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을 실천하고 믿음을 지키고 화평을 이루며 살아갈 것입니다. 분쟁을 일으키기 보다는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의 차이 때문에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다른 점이 오히려
우리를 온전하게 하는 더 큰 그림이라는 것을 깨닫고 겸손하게 서로를 품을 것입니다.
Joe Biden 대통령의
취임 시 시를 읽었던 Amanda Gorman이라고 하는 22살 밖에
되지 않은 젊은 시인이 있습니다. 이 자리는 아주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1961년도에는 “가지 않은 길” (The Road Not Taken)이라는 잘 알려진 시를 쓴 Robert Frost 가 시를 읽었고, 1993년에는 Maya Angelou가 시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 흑인 여성에게 이 영광의 자리가 주어졌습니다. 그의 시 “The Hill We
Climb” 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And
so we lift our gazes not to what stands between us,
but
what stands before us.
We
close the divide because we know, to put our future first,
we
must first put our differences aside…
Let
the globe, if nothing else, say this is true,
that
even as we grieved, we grew,
that
even as we hurt, we hoped,
that
even as we tired, we tried,
that
we'll forever be tied together, victorious.
우리는 우리 사이에 있는 것에 우리의 눈을
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앞에 있는 것에 우리의 눈을 둡니다.
우리는 우리를 갈라놓는 것을 닫아 버립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미래를 먼저 앞에 두려면
우리의 차이를 옆으로 밀어 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슬퍼할 때도 우리는 성장하였고
상처를 받았을 때도 희망하였고
피곤했을 때도 계속 시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승리를
가져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실 때, 우리의 십자가는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도리어 우리를 강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우리의 삶에 의미를
줄 것입니다. 그 십자가가 바로 생명으로 가는, 하나님께로 가는 좁은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 뜻을 알지 못하고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옳게 답하는 것을 보고 그것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마가복음 8:31)
비로소 가르치셨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올바른 대답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내 예수님의 말씀에 반항을 하고 예수를 나무라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유명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의 고통 가운데 두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그
자체의 황홀함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십자가를 가리키고 있다는 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그 십자가가 부활을
가져오는 영광의 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리입니다.
눈을 들어 보십시오. 고통과 어둠 만을 보지 마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십시오.
우리의 갈라져 있는 모습만 보지 마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십시오. 우리에게 우리의
고통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주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아픔을 치유하여 주는 치유가 있을 것입니다.
갈라져 있는 우리들의 마음을 하나로 해주는 하나님의 역사함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의 자리가 바로 산상변화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