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2023년 7월 9일)
마태복음 11장 16-19절, 25-30절
“다 내게로 오라”
오늘 본문의 마지막 세 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8-30)
이 말씀이 참 귀하죠? 이 말씀은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동안 이 말씀을 들었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수많은 사람들이, 참 안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초대의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시는 초대의 말씀입니다. 영어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Come
to me, all you that are weary and are carrying heavy burdens”
모든 자들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예수님의 초대의 음성을 들으시고, 예수님께 나아가 진정한 쉼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다 내게로
오라” 하셨는데, 그래서,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두 오라 하셨는데, 모두가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했을까요? 그래서 진정한 쉼을 얻었을까요? 그렇지 않았다
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누가 “다 내게로 오라” 하실 때에,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어떤 누가 예수님께로 나아가지 못했을까요?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첫번째 단락인 16절로 19절을 보니, 거기서 그 이유를 보게 됩니다. 16절과 19절을 보면 세례 요한과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둘 다 환영받지 못했고요, 오히려,
정죄받고, 비난받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16절로 19절을 다시
보십시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며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마 11:16-19a)
세례 요한이 금식과 참회라는 자기 수양의 삶을 권면해도, 귀신 들렸다 했고요, 예수님이 인생은 기쁨을 나누고 함께 하는 삶이라고 해도, 탐욕의 사람이라 했습니다.
누가 이처럼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정죄하고 비난했을까요?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교만과 독선으로 가득찬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의 세계에
갇혀서,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이 누리는 기득권을 도전하는 두 사람을 정죄하고 배척한 후에, 급기야는 예수님을 죽이는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다음 장인 마태복음 12장에는 이러한 기록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마 12:14)
그러나, 이들에 반해서, 누가 또 등장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25절을 보면,
어린 아이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 11:25)
여기서 “어린 아이”라 하면, 겸손하고 의존적인 존재를 뜻합니다. 종교지도자들과
대조가 되는 것이고, 종교지도자들에게서 결여된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다른 곳에서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라고 하시면서 천국이 그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마
19:14)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 하는 자는, 오히려 지혜에서 멀어져 있는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절대로 지혜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지식이 많을 수는 있겠지만, 지혜는 품을 수 없습니다. 지혜는 내가 취득하거나 쌓아 둘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분명하게 들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스스로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 순간, 우리는 무너지고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팔복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도, 그의 청중은, 그 당시 사회에서 힘없고,
연약하고, 착취당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이 그들에게 참으로 가혹했던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주는 멍에와, 로마 정권이 주는 멍에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누구도 의지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자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5장 3절과 5절만을 봐도,
예수님은 힘 없는 자들과 약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3, 5)
반면에 교만한 사람은, 지혜 뿐만 아니라,
의로움에 대해서도 스스로 얼마든지 세울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입니다. 종교적인 의를 내세우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당시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동일하게 바리새인이 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하나님만을 의지하기 보다, 내 힘과 경험으로 무언가를 증명하려고 하거나, 다른 사람들 보다 더 위에 있으려고 하거나 한다면, 우리가 바리새인입니다.
우리도 바리새인들처럼, 남에게 짐을 지우게 하면서, 우리들은 실제적으로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마 23:4)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있다 하나, 교만과 자기의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어진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들도 포함하여, 모든 자들을 초청하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당신을 배척한 자들도 품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얼마나 멀리 갔는지 물어보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교만한지도 물어보시지 않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하나님처럼 말입니다. 그저 오라고 부르십니다. 바리새인처럼,
교만과 자기의라는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을 그저
부르고 계십니다.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욕망에 묶여 있는 자들도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힘없고, 연약하고,
병들고, 소망을 잃은 자들도, 부르고 계십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시기 때문입니다. 자비와 긍휼이
한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누구도 예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25절에서 한 단어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것은 “그 때에” 입니다.
이것을 헬라어로 Kairos 라고 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이 임재하는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물리적인 시간을
Chronos 라고 한다면, Kairos는 신비하고 영적인 시간을 뜻합니다.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섭리가 드러나는 때
라는 뜻입니다. 더 이상 세상의 원칙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다스리게 되었다 라는 뜻입니다.
죄인도 오라 하시고, 의인도 오라 하시는 것은,
이제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정해 놓은 시간표가 아니라, 그리고 그로 인한 갈등과 폭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세상이 되었다 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교만과 자기의가 가득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삶의
무게에 짓눌려서 허덕이는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품은 크고 넓어서, 우리 모두를 다 안아 주실 수 있습니다. 회개하며 나아가십시다. 예수님만 의지하며 나아가십시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품에 안겨서, 진정한 쉼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성 어거스틴은, 허랑방탕한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로 돌아선 돌아온 탕자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그의 참회록에 남겼던 것입니다.
“Our
hearts are restless until they rest in you.”
우리의 마음은
주님 안에서 쉴 때까지 불안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품에 안겨서 진정한 쉼을 누릴 때에,
우리의 삶의 짐들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멍에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멍에를 새롭게 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짐이 없어지고 멍에가 없어질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멍에가 없어지지 않지만, 그 의미가 달라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의 질고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늘과 땅이,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멍에는, 그 의미상,
다음의 그림과 같이, 소 두 마리가 함께 메는 것을 뜻합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 안에서 쉼을 얻게 되면, 다른 사람의 짐 마저도 함께 질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들의 짐은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겸손히 예수님만을 의지하여 예수님께로 나아갈 때에, 일어나는 놀라운 역사입니다.
교우 여러분, “다 내게로 오라”
하시는 예수님의 초대의 음성을 오늘 이 시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예수님께 어린아이처럼 나아가길
바랍니다. 우리를 당신의 품에 안아 주시고 안식을 베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