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2023년 8월 13일)
마태복음 14장 22-33절
“고난에도 의미가 있는가?”
우리 인생에는 늘 고난이 찾아옵니다. 하나 끝나면, 또 다른 고난이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우리는 고난에서 벗어나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난은, 우리의 삶에 일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어떤 누구도 고난을 달가워할 사람은 없습니다. 고난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거부 반응이 있습니다. 만약 고난을 즐거이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Real 하지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난에 대해서는, 고난을 어떻게 다루는가 가 더 중요한 사안이지, 고난을 없애거나 피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난을 다루는데 있어서, 사람들은 제 각기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행동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난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더욱 더 security 와 stability를 쌓아 놓으려고 합니다. 즉 보장과 안정을 구축하려고 합니다. 가난에 대비해서 재물을 더 쌓아 두고, 노후 복지를 위해서 여러가지로 준비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다고 고난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되나요? 오히려 다른 종류의 고난이 찾아와서 우리가 쌓아 놓은, security 와 stability는 아무런 소용이 없게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고난을 당할 때에, 고난에서 도망갈 때가 있습니다. 그것도 고난을 다루는 방법이겠지요. 고난 당하는 자신의 초라함이 싫어서, 다른 것들에 집중하게 하고, 자신을 산만하게 합니다. 가장 흔한 예로, 유흥과 쾌락 등에 자신을 방치해 버립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더 심각한 고난이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질문하게 됩니다. 고난은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인데,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고난에 대해서 어떠한 반응을 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고난을 어떻게 다루게 될 것이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믿음이 없는 사람과, 고난을 다루는 것이 분명하게 다를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고난이 임할 때에, 어떤 반응을 하십니까? 걱정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쌓여서, 어쩔 줄 몰라 합니까? 아니면, 범에 물려도 정신만 똑 바로 차리면 살아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반응하십니까?
그런데, 믿음이 있는 사람은, 고난이 찾아올 때에, 위의 기술한 것들보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있는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고, 주님만을 찾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인생에 가장 힘든 시기에 놓이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명백하게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고난 가운데 있게 될 때에, 그것은 마치 어두움과 절망 속에 있는 것이기에, 오히려 빛이 더욱 찬란하게 보이게 될 것이고,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고 구하고,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잘 알려진 본문입니다. 그런데, 고난과 관련하여 새로운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고난 받을 수 있는 상황으로 몰고 가셨다 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그런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신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오늘 본문 첫 구절인 22절입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마 14:22)
고난을 직접 주신 것이 아니라, 고난을 받을 수 있는 상황으로 몰고 가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요, 더 이상 예수님이 없는 그런 세상에 살아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고난을 통해서, 그들이 다른 것들을 의지하지 않고, 온전히 예수님만을 신뢰하고 살아가길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 길만이 그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앞서서, 마태복음 8장에서도 유사한 사건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 때에는 풍랑을 만난 배 안에서 주무시고 계셨었습니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14장에서는 두번째로, 갈릴리바다와 풍랑을 통해서, 제자들을 훈련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그들이 의지했던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오직 주님만을 찾고 간구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가 충동적으로 자신도 물 위로 걷게 해달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베드로의 믿음이 컸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직도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믿음이 작은 자여” 하셨던 것입니다. 31절입니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1절)
그런데, “믿음이 작은 자여” 라는 말씀 속에는, 좌우에 날선 검처럼, 양면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의 믿음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라는 뜻이 있지요. 그러나, 또 다른 점은, 앞으로 얼마든지, 성장하고 성숙해질 수 있는 가능성과 여지가 있다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보고 믿음이 아예 없다 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 라는 것은 일종의 신앙 공동체를 뜻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의 여정과 항해를 해야 하는 공동체이기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고난에 담겨진 유익함을 아셨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71)
고난을 통해서, 성장하고, 변화되어서, 주님만을 온전히 신뢰하길 바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하시는데, 신명기에 나오는 말씀처럼, 그들을 훈련시키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신 32:10-12)
그들의 믿음이, 작은 믿음에서, 더 큰 믿음이 되어서, 주님만을 의지하고 창공을 날고, 바다 위를 걸을 수 있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현재, 어떤 고난 가운데에 있습니까? 피하고 싶고, 도망가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작은 믿음일지라도,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도움을 간구하시겠습니까? 수 많은 고난과 실패 앞에서 좌절하지 마시고, 또 일어서고, 또 부르짖고, 또 예수님께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칠전팔기로, 주님만 바라보고 정진하시길 바랍니다.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잠 24:16)
고난과 핍박으로 넘어질 때에, 주저 앉아 있지 마시고, 일어서십시다. 그리고 주님을 부르짖으십시다. 두려워도 주님을 부르짖으십시다. 그러한 과정이 우리의 존재를 정금처럼 그리고 진주처럼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부를 때마다, 주님은 찾아오셔서, 우리의 손을 잡고는,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유령이 아니라, 성령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강한 손과 편 팔로,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라 외치는 베드로를 먼저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야, 믿음이 작은 자여 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간절히 찾고 도움을 구하십시다. 그럴 때에, 우리의 믿음은, 성숙해지고 성장하게 되어서, 삶의 어떤 고난이 와도, 다룰 수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고난은 더욱 유익합니다. 고난에도 의미가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real 하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real한 믿음을 갖게 하여서, 예수님을 real 하게 만나게 해 줄 것입니다.
제자들은 결국 예수님을 보면서 무엇이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했습니다. 마지막절입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33절)
그런데, 고난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기 시작한 사람은요, 자기의 세계속에만 머무르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고난을 받는 다른 사람들을 공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고난이 우리에게 쓴 뿌리를 갖게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고난이 오히려 우리를 넉넉한 사람, 풍성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이것도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유익함입니다. 거기서부터 비로소 진정한 사역과 돌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보는 눈이 달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그저 고난이 아니라, 고난 뒤에 담겨진 주님의 뜻을 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더 이상 고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 이상하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어려움이 많아도, 다 헤쳐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그것을 보았고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3-4)
이번 원주민 선교는 하나님의 은혜로, 잘 다녀왔습니다. 한국어예배와 영어예배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 준비과정과 선교지에서 실제로 사역할 때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왜 없었겠습니까? 언어가 다르고, 연령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삶의 철학이 다르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의 색깔이 달랐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속에서 서로를 배려하고,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는 열린 마음이 있었기에, 때로는 힘들고 괴로왔지만, 아름다운 결과물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성장과 성숙과 변화의 시간들을 경험하였습니다.
잠언기자의 말씀처럼,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듯이, 사람이 사람을 날카롭게 했습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As iron sharpens iron, so one person sharpens another.” (NIV)
선교는, 인간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것이고, 하나님만이 홀로 주관하시고 영광 받으시는 것임을 더욱 더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삶에 고난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신앙으로 살려고 할 때에는, 더 하면 더 하지, 못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유익함이 될 수 있도록, 믿음으로 그러니까, 오직 주님만 바라고, 간구하셔서, 여러분들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고난의 현실에서 경험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길 외에는 고난을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