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23일
성경:
마태복음 13:24-30, 36-43
설교:
악을 이기라
지난
주에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육신에 대해 묵상해 보았습니다. 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우리의 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존재하는 어두운
자신, 그림자 자신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없앨 수도 없고 제거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의 모든 것을 마비시킵니다.
그것을 갖고 산다는 것이 참 싫지만 그 육신이 바로 우리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마치 자기가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육신에
관하여서는 우리는 아무런 힘도 없게 됩니다.
우리의
온전한 무기력함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고 성령의 힘을 통하여 이제, 육신의 힘은 더이상 우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우리 속에
있지만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 안에 거하지, 육신 안에 거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우리의 삶에서 또 다뤄야 하는 커다란 딜레마를 놓고 묵상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우리 속에 있는 육신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우리 속에만
있는 문제라기 보다는 우리 밖에도 존재하는 문제 입니다. 우리의 사회 속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바로 악의 문제 입니다.
이
악의 문제를 다룰 수 있도록 예수님은 우리에게 비유를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 비유를 다시 한번 살펴 보십시다.
어떤
사람이 좋은 씨를 그의 밭에 뿌렸습니다. 그런데 싹이 나고 결실할 때 보니 거기에 가라지가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종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마태복음
13:27)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은 좋은 세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지와 바다를 창조하시고 참 좋다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식물과 과일을 만드시고 참 좋다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해와 달을 만드시고 참 좋다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물고기와 공중에 나는 새를 만드시고 참 좋다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동물을 만드시고
참 좋다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심으로 그의 창조를 완성시키시며 참 좋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항상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선한 일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이 거기에 있습니다. 고통이 있고, 아픔이
있고, 어려움이 있고, 슬픔이 있습니다.
우리도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마태복음
13:27)
예수님은
이 세상을 바라보실 때, 유토피아의 눈을 가지고 바라 보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보시고 여러분의 삶을 보실 때, 유토피아의 눈으로
여러분을 바라보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겉으로 좋아 보이는 모습에 속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셨습니다.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고 역사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거룩해 보이는 장소에서 거룩해 보이는 사람들 속에 악이 역사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악의 권세를
보셨습니다. 악이라고 하는 것의 진정한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런데 이 악이 또한 선과 깊이 엉켜 있다는 것도 보셨습니다.
악은
선과 서로 섞여 있고 맞물려 있습니다.
돈이
좋은 목적을 위해 사용될 때, 예를 들어 그것이 꼭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될 때, 돈은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 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돈을 사용하여 사람들의 관계를 파괴하고 인간성 마저 파괴합니다. 종교가 사람들로 하여금 선을 추구하게 하고 관대함을 갖고 살게 할 때,
종교는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바로 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악은 종교를 통하여 차별주의를 만들고, 전쟁을 만들고, 편협적인 마음을 만들어
버립니다.
모든
것에 선과 악이 서로 얽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종이 와서 자기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안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마태복음 13:28)
다른
말로 가라지를 다 뽑아 버릴까요?
주인은
말합니다. 아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마태복음 13:29)
다른
말로 말하면, 곡식과 가라지가 그 뿌리에서부터 서로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잘못하면 가라지를 뽑으려고 하다가 곡식마저 망가뜨릴 수 있다 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악, 혹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은 우리가 쉽게 간단하게 뽑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이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그들의 좁은 견해로 정의해 버렸습니다. 율법을 사용하여 그것을 정의하였습니다.
그리고 의로운 사람과 죄인들을 구별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예수님을 죄인의 카테고리에 집어 넣었고, 예수님의 사역을 악한 사역으로 단정지었습니다.
그들이 악을 다루는 방법은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면서 악을 제거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라지를 뽑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합니까? 악이 판을 치는 그곳에 그저 앉아서 바라보기만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한가지 확실하게 말씀해 주신 것이 있습니다. 결국, 악은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악이 궁극적으로 선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악에 대한 판단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태복음 13:30)
그리고
나중에 제자들에게 그것을 풀어서 설명해 주십니다.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태복음 13:39-43)
결국,
악은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 선은 이길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에 새기며 사십시오. 우리는 이 궁극적인 승리에 확신을 갖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나갈 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선하심을 회복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립보서 1:6)
우리는
아직도 계속해서 선한 씨앗을 뿌릴 것입니다. 악이 거기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하나님께서 이루실 줄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욥이 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많은 악한 일들이 그에게 일어났습니다. 그의 모든 재산이 하루 아침에 다 날라갔습니다. 자기의
7 아들과 3 딸이 한꺼번에 죽었습니다. 그의 가축들이 다 죽었습니다. 그의 종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나중에는 자기 홀로 남아 있었고, 몸 전체에 종기가 퍼짐으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악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악은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소망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우리를 결별시킵니다.
Raging with Compassion: Patrol Responses to the
Problem of evil을
쓴 John Swinton은 욥기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욥기의
중심되는 메시지는
No: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죄가 없이 고통 받는 자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였는가?
Yes: 어떻게 인간이 악이 주장하는 그곳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악은
당신에게 고통을 줄 뿐만 아니라 악의 궁극적인 목적은 소망과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당신을 갈라놓는 것입니다. 악에게 지지 않고 저항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소망을 갖고 살고 계속해서 사랑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있을 때, 악은 우리를 주장할 수 있는 힘을 잃고 말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메시지 입니다.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아버지의
손에 나를 부탁합니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은
믿음, 소망, 사랑으로 지켰습니다.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용서를 구하는 기도마저 하셨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악이 그 절정에 이르렀을
때에도 예수님은 사랑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악은
십자가에서 그의 힘을 잃었습니다. 악을 저항하는 것은 악을 싸우는 것만이 아닙니다. 악의 현실 가운데, 믿음을 지키고, 소망을 지키고, 사랑을
지키는 것입니다.
결국,
선이 이길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믿음, 소망, 사랑을 지킴으로 악을 저항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