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2023년 9월 17일)
마태복음 18장 21-35절
“용서는 새로운 미래를 열어 준다”
오늘 본문은 용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인데, 오직 마태복음에만 나오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베드로의 그 유명한 질문이 나오고 있는데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마 18:21)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용서에 대해서 신중하고, 최선을 다하려고 하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급하고 다혈질이고 충동적인 사람이라는 선입관이 있다면,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용서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베드로가 다가 아닙니다. 베드로는, 자기에게 죄를 범한 형제나 자매를
용서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몇 주 전 주일 설교 본문처럼, 악을 선으로 갚으려고 하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7절 말씀이었습니다. (슬라이드)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롬 12:17)
그런데 베드로의 이런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알 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슬라이드)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 18:22)
칠 곱하기 칠십하면 사백구십인데, 사백구십 번까지만 용서하고 그 이후로는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않다 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용서에 대해서 순종하고 실천하려는 그의 귀한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더 깊은 경지로 인도하시고자 함을 보게 됩니다. 아직은 미숙하고 온전하지 못한 베드로의 용서를, 성숙하고 온전한 용서의 깊은 바다로 인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늘 그러셨습니다. 복음서에 나와 있는 예수님은 늘 그러셨습니다.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에, 그들의 수준과 상태를 인지하시고, 그것들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오늘 베드로의 질문을 보면, 용서에 대한 그의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용서는 counting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이해와 경험과 틀에 맞아야만 용서하겠다는 베드로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용서가
될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Counting 하는 용서는, “용서” 라고는 할 수는 있겠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Counting 하는 용서는, 머리로 하는 용서일 수 있습니다. Counting 하는 용서는, 입으로만 하는 용서일 수 있습니다. 머리와 입으로 하는 용서는, “나는 용서했다” 라는 자기 합리화를 가지게 할 수 있습니다. 결국, counting 하겠다는 것은 조건부를 뜻합니다.
그런 용서로는, 절대로 우리가 받은 상처와 쓴뿌리를 치유할 수 없습니다. Counting 할 때마다 오히려 우리의 쓴뿌리가 더 깊이 뿌리 내릴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더욱 매여서, 미래는 커녕, 현재의 삶도 제대로 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미국 신학자인 Lewis B. Smedes 라는 사람은, 그의 책 Forgive and Forget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Forgiveness is letting go of the hope that the past can
be changed.”
“용서는 과거가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는
것입니다”
Counting 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용서는 countless, 셀 수 없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용서의 다른 세계가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땅에서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도 용서에 대해서 유사한 말을 남겼습니다.
“Forgiveness is not an occasional act; it is a constant
attitude.”
용서는 가끔 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용서는 변함없는 태도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비유의 이야기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는 Counting 하여, 머리로, 계산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했던 핵심입니다. 27절입니다.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마 18:27)
불쌍히 여김을 헬라어로, splagchnizomai 라고 하는데, 이 단어 안에는 내장이 뒤틀린다 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머리로도 아니고, 계산기로 두들겨서도 아니라, 또는 윤리 도덕적인 의무감도 아니라, 존재 중심에서 아파하여 불쌍히 여기는 긍휼로만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 안에서 일어났던 것도 이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35절에서 거듭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 18:35)
이 마음이 긍휼의 마음입니다.
용서는, 공동체에 그리고 관계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입니다. 해도 되고 안해도 되고가 아닙니다. 공동체가 건강하게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 긍휼의 용서가 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소하게 그리고 때로는 심각하게 아픔을 주고 받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 대한 해결은 용서 뿐입니다. 다른 길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매우 어렵습니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자기 자신이 피해자로 남아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여전히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 라는 염려 때문에, 용서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커녕, 내 손으로 복수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를 알고 둘은 모르는
소치입니다.
그런 감정과 생각은 실제적인 것들이지만, 근본적이고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해결이 없습니다. 악순환만 거듭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를 긍휼로 용서하셔서, 과거에 얽매여 살지 않고, 늘 새로운 미래를 살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자유케 되어서 새로운 관계들을 맺으며 살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행복하고 의미있게 살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용서는 이처럼 사랑의 가장 귀한 모습입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옆에, 두 강도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예수님의 긍휼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기에 다음과 같이 간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눅 23:42)
반면에 다른 강도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간구한 이 강도와도 같습니까?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다른 강도입니까? 용서함 받을 수 없었던 존재가, 용서함 받았음을 깨달으십니까? 영원토록 용서함 받은 존재라는 인식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사백구십번이 아니라, 사억구백만이라도 우리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믿는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이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긍휼의 보혈이, 여러분들을 묶임에서 풀어주시고, 여러분들 안에 긍휼의 마음을 세워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용서가 더 이상, 말로나, 머리나, 또는 카운팅에 그치지 않고, 공동체를 살리고, 관계를 회복시키는 영적인 용서가 될 것입니다. 만일 용서가 머리로는 되는데, 마음으로 되지 않는다면, 십자가를 바라보십시다. 그리고 기도하십시다. “예수님, 저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용서할 수 있는 긍휼의 마음을 주세요” 기도하십시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돌 같은 마음을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Kintsugi 라는 일본 말은, 깨진 그릇들을 금 가루와 풀로 붙이는 기술을 뜻합니다. 깨진 그릇도, 어긋나고 모가 난 조각들도, 서로 금가루와 풀로 붙일 때에, 더욱 아름다운 그릇이 되며, 더욱 단단한 그릇이 된다고 합니다. 이 공동체도 예수님의 보혈로, 긍휼의 용서로, 관계가 회복되어, 어느 때보다 서로를 존중하고 돌보는 그런 단단한 공동체가 되어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이 교회를 섬기며, 새로운 미래로 향하여 함께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며 거기서 흘러나오는 긍휼의 용서를, 우리 또한 품고 흘려 보내길 바랍니다.
찬양: 십자가 그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