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2023년 12월 17일)
요한복음 1장 6-8, 19-28절
정체성이 주장하는 삶
우리 모두는 행복한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기쁨이 넘치고, 소망이 넘치며, 가슴 깊이 감사하며 살아가는
행복한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각 사람에게 고유한 정체성이 제대로 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이는, 의미있는 삶을 살 수가 없고,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정체성이라는 것은 영어로 identity 라고 하는데, 다른 말로 말하면, subjective
self 라고 합니다. 주관적인 자아 라고 합니다. 자신에게 있는 여러가지 고유한 성품들에 의해서 결정된 자아를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의 고유한 정체성에 의하여 살아가기 보다, 다른 사람의 정체성, 또는 혼동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때가 많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정체성이라는 것이, 감투를 쓰고 직함들이 주어진다고, 달라지는 것일까요? 또는, 어떤 업적들을 쌓아 놓는다고, 그 사람의 정체성이 달라지는
것일까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사람의 정체성, 그러니까 삶을 살아가게 하는 중요한 태도를 바꿔주지 못합니다.
Wannabe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의 뜻은, 자기 자신에 충실하기 보다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정체성의 혼돈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니, 자기 자신을 그러한 가운데서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방황하고, 허송세월하며 살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례 요한은, 흔들리지 않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19절을 보면, 종교지도자들이 요한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19절)
“네가 누구냐?” “Who are
you?”
그런데 요한은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고, 엘리야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다 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어서 나오는 20절로 2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0-21절)
요한은, 본인의 정체성에 대해서, 얼마나 확실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고유의 정체성을 진정으로 알고, 그것에 따른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면, 그래서 행복한 인생, 의미있는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내가 아닌 것들부터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아닌 것들을 추구하는 것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wannabe이고, 혼동된 정체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때에, 그러니까, 사도요한이 본 예수님은, 늘 I AM 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I AM 은 하나님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불타는 떨기 나무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I AM WHO I
AM” 이었습니다.
동일하게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I AM 으로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나는 목자이요, 나는 문이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등등 말입니다. 수 없이 반복해서 I AM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육신 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역사하시고 구원하시는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무엇이 아닌 지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그것을 드러내어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I AM NOT…나는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I AM WHO I AM 하실 때에, 우리 인간은 I AM NOT 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은, 지난 봄학기 화요성경공부의 내용처럼,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입니다.
진정한 정체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이틀, 업적, 커리어, 학위 등이 있기에, 고유한 정체성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허영과 욕망을 내려 놓고, 벗어 버릴 때에, 그리고 내가 아닌 것들을 추구하지
않을 때에, 고유하고 진정한 정체성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한 우물을 파야 합니다. 그럴 때에, 그의 삶은, 의미가 풍성해지고, 행복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아름다운 것들은, 허영과 욕망을 내려 놓을 때에, 비로소 보이게 되고, 그것들의 진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고집 부리고, 떼를 썼던 것들을 그만 둘 때에, 비로소 더 큰 세상이 우리의
눈 앞에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한 두가지를 내려 놓았을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수 만가지를 베풀어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요한복음 3장에서 같은 의미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예수)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 3:30)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덧입고 무엇을 쌓아두려고
할 때에, 우리의 정체성은 혼탁해지고, 삶의 포커스는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가 아니다, I am not을 말할 수 있었기에, 그는 예수님을 제대로 지목할
수 있었고, 증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7-8절이 바로 그러한 세례 요한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가 증언하라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7-8절)
내가 빛이 아니고, 예수님이 빛이시다 라고 하는
증인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이었을까요?
이 세상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 우상에 빠져서, 자기가 하나님이 되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세상에는 말할 수
없는 갈등, 폭력, 아픔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진리 보다는 거짓을, 사랑 보다는 억압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삶을 사는데도, 마치 불나방처럼 불을 쫓아 다니다가 홀랑 타버릴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빛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었습니다. 자신이 빛이
아님을 정확하게 알 때에, 진정한 빛을 더욱 볼 수 있는 것이고, 그 빛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빛을 발견하고
빛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는 사람은,
절대로 빛을 가리는 손바닥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빛이 이 세상 가운데 환히 비치도록 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23절에서 세례 요한이 한 말의 뜻입니다.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3절)
나는 결코 빛이 아님을 그토록 끝까지 지켰던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흔들리지
않는 정체성 때문에, 이 세상은, 빛이신 예수님,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매우 가까이에서, 그리고 친숙하고도, 친밀하게 느끼고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빛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럽고 기쁜 일이겠습니까? 빛이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삶은, 매우 명예스럽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의 삶은 늘 예수님을 향해서 나아가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고 인도하실지를 주목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고는, 계속해서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도라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닙니까? 기도하는 삶이 그런 것이 아닙니까? 기도가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늘 빛이신 예수님께로 우리 자신을 향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환란이 임하여도,
금방 빛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둠에 머무르게 되어도,
금방 빛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빛이 우리의 어두움을 몰아내길 간구하게 됩니다.
예수회 신부인 William A. Barry 는 그래서 기도를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습니다. Prayer as conscious relationship.
의식적인 관계로서의 기도 라고요. 기도가 행위가 아니라, 기도는 우리의 의식이 늘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한가지
사실로 인해서, 여러분들의 정체성은, 어떤 것으로도 흔들 수가 없습니다. 그 정체성이면
됩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귀한 것입니다. 그 정체성을 귀하게 여길 때에, 우리는 부질없는 것들을 내려 놓고, 오직 예수님만을
가리키는 증인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빛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 참 위로와 구원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지난 대강절 첫번째 주일에, 교단 주관의 특별예배를 드린 것도, 손가락이 되어서 빛이신 예수님을 가리켰던 것입니다. 그 손가락을 우리 자신에게로 향했다면, 성령님의 아름다운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를 비우고, 남을 낫게 여기며,
섬기며 돌보려고 할 때에, 오직 예수님만이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게 있는 이 귀한 정체성을 가지고, 이 세상을 섬기며, 빛이신 예수님만을 가리키는 증인된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