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10일
성경: 이사야 40:1-11
설교: 불편함 속에서 발견된 편안함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사야 40:1)
이사야 선지자가 외쳤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사람들에게 이 메시지를 외쳤습니다. 이사야의 소리는 그들의 어두운 현실을 뚫고 메아리치며 울려 퍼졌습니다.
이 이미지를 헨델은 아주 잘 포착하여 그의 음악으로 우리에게 표현해 주었습니다. 헨델의 메시야를 들으면 오케스트라의 아름다운 서곡이 나오고 처음으로 나오는 목소리가 바로 테너의 목소리인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읽은 본문의 일절 입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그런데 저에게는 이 메시지가 참 이상하다고 느껴졌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맞는 메시지처럼 들립니다. 포로로 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잘 맞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벨론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적인 현실을 잘 아신다면 여러분들도 이사야의 메시지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포로의 생활을 하였지만 그들의 삶이 그렇게 나빴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포로의 신세였고, 자기 고향에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의 생활은 편했습니다. 너무 편하여 실상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페르시아의 왕인 고레스가 이제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였지만 가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서 그들에게 돈까지 주며 가라고 하여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생활이 편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러니 이사야는 편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으니 이상하다는 말이지요.
여기서 여러분에게 영어 단어를 잠깐 설명해 드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어 단어에 위로 라는 말은 Comfort 라고 하는 단어를 씁니다. 거기서 나온 단어가 Comfortable 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 Comfortable 이라고 하는 단어는 편안하다 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 Comfortable 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Comfort 하라 라는 메시지를 전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 Comfort와 Comfortable, 위로와 편안하다 라는 것은 참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편안하다라고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참 중요합니다. 경제적으로도 편안하기를 원하고 육체적으로도 편안하기를 원합니다. 요즘 말로 말하면 이 편안한 삶을 웰빙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가능하면 불편함이 없이 살기를 원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 중에 이런 단어가 있습니다. Domotics 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전자 시스템을 사용하여 여러분의 집을 컨트롤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밖에 나가 있어도 여러분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전화로 불을 키고 끌 수 있습니다. 우리 애들 집에 가면 그 애들이 집에 없어도 우리에게 문을 열어줄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Smart Home을 만드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이 애들을 키울 때와 지금은 아주 다릅니다. 지금은 애들 방에 baby monitor라는 것을 설치하여 그것으로 애가 무엇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 방에 없지만 마치 그 방에 있는 것과 다름 없이 애를 볼 수 있다는 말이지요. A smart Home. A smart TV. A smart Phone.
이제는 차도 하도 smart 해서 키를 넣고 시동을 걸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주머니에 Remote만 갖고 있으면 문도 열리고 시동도 걸립니다. 제가 한번 해밀턴에 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려고 하는데 차 문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몇번 시도를 했는데도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보니 열쇠도 없고 난감했습니다. 아마 리모트의 배터리가 약했던 것 같습니다. 그 리모트 속에 열쇠가 있는 것도 몰랐습니다. 겨우 몇번 하니 그래도 배터리가 좀 남았는지 문이 열려 다행히 집에 돌아 왔습니다.
모든 것이 다 우리의 삶을 편하고, 편리하게 만드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다 편리하다고 마음의 평안, 위로가 있습니까? 진정한 위로와 평안은 편하고 편리하다고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위로는 편한한 것보다 더 깊은 평안입니다. 편리하고 편한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슬픔이 씻겨질 때, 우리는 진정한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의 죄책감이 지워졌을 때, 우리는 진정한 위로를 받습니다. 어제 영어예배 교우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자기 친구 아이가 지금 25살 밖에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친구집에 갔다가 쓰러져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모든 것을 편안하게 해 놓고 살았다 할지라도 그들의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하려고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편한 환경에서 편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진정한 평안함이 필요합니다.
진정으로 편하다는 것은 불편함이 없는 삶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편한 삶을 살기 위해 가능하면 불편함을 없애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개구리 soup을 어떻게 만드는지 누가 말해 주었습니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개구리를 물에 넣으면 아무것도 모르고 개구리는 수영을 하면서 즐깁니다. 그리고는 물의 온도를 조금씩 올리는 것입니다. 개구리는 그 물의 온도에 적응을 하면서 계속 수영을 하다가 자기가 지금 요리가 되고 있는 것조차도 모르면서 수영을 하다가 결국, Soup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만약 편안함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불편함을 주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것이라면, 예를 들어, 스트레스, 걱정, 짜증, 이런 것들을 없애는 것이 진정한 편안함이라면 죽는 것이 가장 편한 것입니다. 병원에 보면 Palliative Care라고 하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 가면 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죽을 때까지 편안하고 고통이 없이 죽게끔 도와주는 곳입니다.
진정한 편안함은 불편함의 부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편안함을 주시기 위해 불편함을 거둬가시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자기 몸에 가시가 있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 가시가 바울에게 고통을 주었고, 그의 삶을 아주 불편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그것이 불편하니 가시를 뽑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때 그에게 큰 지혜를 허락하십니다. 단순히 말해,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바울에게 주신 것입니다. 행복한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이 너의 삶에 모든 가시를 뽑아내 버리는 것이 아니다. 삶의 목적은 너에게 불편함을 주는 모든 가시를 뽑아내는 것이 아니다. 너의 가시를 품으라고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시를 품고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가 족하니, 너의 가시를 네가 품고 살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을 불편하게 하는 모든 사람들을 제거해 버리면 삶이 더 행복해 집니까? 여러분에게 스트레스와 어려움을 가져다주는 모든 것을 제거해 버린다고 삶이 더 행복해 집니까? 여러분이 갖고 있는 모든 가시를 다 뽑아 버리면 여러분의 삶이 더 행복해 집니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들을 다 제거한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더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불편함 속에 오히려 행복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불편함을 끌어 안으십시오. 여러분의 삶의 불편함을 환영하십시오. 이 불편함이 여러분에게 많은 가르침을 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통이 연단을 가져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3, 4)
그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한다고 하였습니다. 불편함을 그는 피하거나 밀어 내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불편함을 끌어 안았습니다. 그의 고통을 끌어 안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 Simone Weil 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길이 힘든 것이 아니다. 힘든 것이 우리의 길이다.
우리의 길이 힘들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힘든 것 그 자체가 우리가 가야할 길이라는 말입니다.
편안함과 불편함은 서로 상극적이고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불편함을 통해 편안함을 가져다 주십니다. 여러분이 불편함을 경험할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끌어 안아주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이사야 40:11)
여러분이 불편함 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오셔서 여러분들을 안아주시고, 여러분에게 편안함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슬프고 외로울 때, 하나님께서 오셔서 여러분을 끌어 안으시고 여러분의 슬픔과 외로움을 거두어가 주실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참된 평안, 위로, 편안함을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삶의 불편함을 끌어안고 그것을 환영하는 삶을 살 때에, 여러분은 많은 지혜를 얻게될 것입니다. 그 불편함이 여러분을 연단시킬 뿐만 아니라, 심지어 여러분 속에 깊은 소망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두려움이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이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것처럼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여러분의 불편함을 마다하지 마십시오. 뱉어내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진정한 편안함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게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아주심을 경험하는 것. 그것이 참된 위로이고 참된 편안함입니다. 참된 편안함은 불편함 속에서 발견되어 집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28-30)
불편함이 없는 사람이여 내게로 오라 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삶이 불편한 사람들이여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진정한 쉼을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위로요 편안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