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26일
성경: 갈라디아서 5장 1, 13-24절
설교: “사랑으로 종노릇하라”
어저께가 6.25 이었습니다. 공산세력이 한반도를 적화시키려고 침공했을 때에,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유엔이 연합군을 보내며, 한반도에서 함께 싸운 전쟁이었습니다. 그때에 참전했던 나라들과 사상자들의 숫자와 이름들은, 미국 워싱턴 DC 에 있는 Korean War Memorial 에 자세히 나와 있는 것을 몇 년 전에 가족 여행 중에
들러서 볼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또한 조금 있으면 광복절이 됩니다. 8월 15일 광복절도 일제의 억압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되찾은 날입니다. 이처럼, 근대사에 일어난 두 가지 사건을 보더라도 우리 한인들은 이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나라 뿐만이 아닙니다. 한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억압에서 자유로 나아가고자 하는 몸부림과 투쟁의 연속입니다.
남아공의 인종차별 정책에 대항했던 넬슨 만델라는요, 28년동안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강산이 세 번 바뀐 긴 세월이었습니다. 그의 자서전인 “Long Walk to Freedom” 을 보면, 감옥생활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간은 그가 Robben Island 에 있는 감옥에서 18년동안 보내었던 시기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낮에는 채석장에서 고되게 일하고 밤에는 변호사 공부를 틈틈히 했었다 라고 합니다. 결국 그는 출옥한지 4년 뒤에 총선을 통해서 남아공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도, 자유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1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 5:1)
어떤 신학자는 말하길, 이 구절이 갈라디아서 전체를 대변해 주는 핵심구절이라고까지
말할 정도입니다.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종”은 헬라어로 doulos로서 slave 라는 뜻입니다. 노예라는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죄로부터, 율법으로부터, 그리고 과거로부터 자유케 하셨으니, 다시는 노예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노예의 멍에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그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믿고 구원받은
복음 이외에, 그것으로는 부족하다며, 율법을 지켜야 하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거짓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크리스천이 되려면, 먼저 유대교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노예의 멍에 라는 것이, 바로 율법과 할례를 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율법과 할례를 더 이상 행하지 않아도 되게끔, 자유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거짓된 주장을 하면서, 다시 억압하려고 하니, 바울은, 이 복음을 변호하고 보호하기 위해, 단호하게 말했던 것입니다.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1절)
육이오 때에 있었던 일아라고 합니다. 시골 길에 어느 할머니가 머리에 무거운 짐을 이고는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미군 병사가 자기 지프에 타라고 해서 할머니는 뒤에 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군 병사가 백 미러로 보니, 그 할머니는 지프 차에 탔으면서도 여전히 그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앉아 있었다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모든 것을 해결하시고 그래서 자유를 주셨건만, 만약 다시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행한다면, 이 할머니와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3절을 보면, 지금까지 알아본 말씀과는 상반되는 말씀을 하는 것만 같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갈 5:13)
1절에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했는데 13절에서는 “서로 종 노릇 하라” 라고 하니 말입니다. 1절에서는 자유를 누리라고 하는데 13절에서는 노예가 되어라 하니 말입니다.
이 두 가지 상반되는 것 같은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런데, 이 두 가지 말씀은 상반되는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진정으로 믿고, 성령을 경험한 자들에게는, 이 두 가지 말씀이 하나이고 진리임을 가슴 깊이 깨닫고
공감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이 베풀어 주신 구원과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지 몸소 경험한 자들에게 일어나는 놀랍지만 당연한 현상인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고 경험하게 되니, 본인도 예수님처럼 되고자 기꺼이 그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기꺼이 스스로 매인 자가 되기로 자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종노릇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래서 예수님의 종이라고 스스로 천거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입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 1:10)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8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예수님)가 진실로 진실로 네(베드로)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을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 21:18)
자기가 더 이상 자기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종이 되어서 주님을 위해서 쓰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자유를 진정으로 경험한 사람은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스스로 종이 되고자 할 것이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자유케 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주시는 자유에 담겨진 능력입니다.
지난 주일과 또 오늘을 위해서, 음식을 준비하는 여선교회 회원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교회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드리며 봉사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는 커녕 억압하며 주인 행세를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전혀 없지만 말입니다. 그것은 아직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고, 자유함도 경험하지 못했다 라는 반증이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주인 행세를 하고 있지만 그래서 마치 그에게 상당한 자유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오히려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만약, 이 세상의 문화에 젖어서, 자기 자신의 공명과 이익을 얻기 위한 욕망에 사로 잡혀 있다면, 그들은 노예된 사람들입니다. 만약, 자기 자신에게 있는 그 어떤 것들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고 억압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육체에 속한 사람이고, 하나님과 복음은 개념 뿐인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더 이상 사람들 사이에는 담이 없고 차이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했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8)
그러므로, 인종차별, 성차별, 나이차별 등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은 여전히 육체에 속한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성령과는 관계가 없다 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19절로 21절에 기록된 육체의 일을 서슴없이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유도 없고, 성령도 없고, 사랑도 없으니 서슴없이 자신의 욕망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 5:19-21)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자유를 경험한 사람은, 그의 삶의 가치관이 달라지고, 삶의 목적이 달라지게 됩니다.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어젠더가 중요해지지 않고, 공동체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살게 됩니다.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가 달라지게 됩니다. 이 세상이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세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전에는 what’s in it for me?
나를 위해서 무엇이 있는지 를 늘 추구했다면, 이제는 이 세상을 위해서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하나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오늘 본문 22절에서 말하는,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
금지할 법이 없다 라는 말은, 율법으로도 제한할 수 없어서, 흘러 넘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이 자유를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고자
할 때에 일어나는 아름다운 현상입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생명이 넘치고, 사랑이 넘쳐서 열매 맺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분의 희생과 사랑에 대해서
새로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복음을 겸손하고 진실하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 살면서, 세상에 젖어 있을 수 있는 우리를 돌아보고 각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하십시다. 나에게 자유를 주시옵소서, 나에게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시옵소서 라고요. 그것만이 내가 살아가야 할 내용이고 목적입니다 라고 간구하십시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허락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디모데 교우 여러분, 예수님이 주시는 자유를 통해서, 여러분이 자유케 되시고, 그래서 억압 속에 있는 자들을 자유케 하는 귀한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이 교회가 성령 충만하고 사랑이 충만한 교회가 되어서, 이 세상에 소망이 되고, 구원의 방주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할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줄 아십니까? 오직 예수님만이 높임을 받는 아름다운 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길은, 다른 길이 없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 뿐입니다. 그렇게 하는 자가 신앙의 사람이고, 자유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