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4일 주일예배 설교
“선한 싸움을 싸워라”
이사야 50:4-9
이사야는 바빌론의 계셨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한 포로된 자였습니다.
그는 포로된자들을 섬겼습니다. 그는 곤고한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특정한 능력을 주셨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이사야 50:4)
이사야의 능력은 지친 포로된 자들에게 말로 힘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선한 일을 하도록 지어졌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저는 이 땅에서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선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엑 이 능력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줄 것을 받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들이 감사하고 appreciate 할걱을 바랍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선함을 높이 평가할
때, 우리는 에너지를 얻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선에 대한 확인을
원합니다.
하지만 어쩐지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나의 좋은 의도가 항상 좋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내가 하려는 좋은 것 대신 나쁜 것만
봅니다.
사실은, 우리는 모두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섞여 있습니다. 저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저는 좋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지만 때로는
내 안의 나쁜 일로 인해 왜곡됩니다. 제가 하고 싶은 좋은 것을 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우리의 나쁜 것을 봅니다. 우리가 얼마나 나쁜지 알게 해줍니다. 그들은 제 결점을 지적하고 싶어합니다. 남들이 나쁜 것만 보고 / 좋은 것은 안 보고 / 좋은 일을 하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의심이 들어옵니다.
이것이 이사야가 직면하고 있던 딜레마입니다. 그는 곤고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잘 받아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만 듣고 싶은 유혹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이사야 50:5)
그는 조용히 있을 수 있었고 / 어떤 반응도 일으키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귀를 닫지 않았습니다. 뒤로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선한 일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신념은 어디서 비롯된 것입니까? 다른 사람들의 승인이 필요하기 때문에
움직입니까?
아니면 무엇이
좋은 것인지에 대한 가장 깊은 신념에 이끌렸습니까? 여러분은 신념에 따라서 최선을 다해 선한 일을 하고 있습니까?
이사야는 자신이 하는 일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확신이 흔들하지 않았습니다. 그 확신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이사야 50:4)
그는 매일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가 해야 할 일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을 알고, 그 확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올 때, 어떤 것도 여러분을 흔들 수 없습니다. 남들이 거부해도 해야 할 일에는 단호하게
설 수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사야가 오늘의 구절에서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종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종이 누구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이 종은 더 이상적인 image 였습니다. 새로운 인간의 이상. 망명 중에 이사야는 새로운 인간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보았습니다.
그의 망명 경험은
그가 삶을 보는 눈을 바꿨습니다.
그는 약자들의
삶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경험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는지. 그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의 극명한 대조를 보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인간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주었습니다. 선함이 이끄는 인간.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이사야 11:6)
전쟁은 이제 그만. 약자에 대한 강자의 지배는 이제 없습니다. 오직 선함.
종은 인간의 새로운
비전을 구현했습니다. 미움에 반응하지 않는 인간. 분노와 폭력의 고리를 끊은 인간. 선이 악을 이겨내는 인간. 이 종은 선함을 이어나가고 다른 사람들의
미움을 흡수할 것입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사야 50:6)
No 복수. No 미움. 자신감만. 단호함만. 오직 선함. 유배자들이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는 방법은 권력이 아니라 의연한 선함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 비전이 유대인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습니다. 하지만 600년 동안, 그것은 그들의 상상에 불과했습니다. 600년 동안 그들은 힘으로 움직이는 세상에서
이 비전을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그러나 600년이 지난 후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종의 비전을 예수님의
삶과 연결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이 종 처럼 하나님의 선함 속에서 살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선함은 그에 대한 반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반대했습니다. 그를 경멸했습니다. 그를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미움에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절에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순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그들의 증오와 거부를
흡수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함을 믿었습니다.
증오와 악이 예수를 죽였지만, 하나님은 예수를 죽음에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자신감이 증명되었습니다. 증오와 악은 선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사는 믿음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부활절을 기념하는 이유입니다.
다음주가 부활절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일년중에 가장 중요한 날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함을 증명하는 날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날입니다.
당장은 악과 증오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선함이 우세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모두 자신의 도전을 겪었습니다. 여러분은 장애물을 극복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함이 여러분의 삶에
우세합니다.
하나님의 선함이
승리했기 때문에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선함을 보여주는 증인들입니다.
하나님의 선함이 여러분 주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함은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창조하신 선이 여전히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함은 여러분의 죄보다
더 큽니다.
오늘 우리의 싸움은 선을 위한 싸움입니다.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힘을 얻으려고 눈을 돌립니다. 그 두려움이 그들을 비열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선의 편입니다.
선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선한 싸움을 싸우세요. 하나님의 목소리를 여전히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따라가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그냥 하십시오. 하나님의 선함에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겁니다.
우리는 선한 싸움에 figh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