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2022년 10월 2일)
누가복음 17장 5-10절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믿음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믿음에 대해서 귀하게 여기고, 믿음 생활을 제대로 하고자 한다면,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놀랍고 아름다운 경험들을 반드시 하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믿음 생활을 성실하게 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자녀손들 위에 흘러 넘치길 바랍니다.
그런데 믿음이 이 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또한 믿음에 대한 오해도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믿음에 대한 오해로 인해서, 믿음의 깊은 자리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을 하거나 퇴보하는 경우가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난 화요성경공부에 참석한 교우들은 들었던 표현입니다. 인생이 이렇다, 또는 저렇다 라고 말하면서 인생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은, 아직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한 것처럼, 인생은 신비입니다. 그리고 인생을 신비로 인도하는 믿음은 더욱 신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도, 믿음에 대해서 예수님께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5절 말씀입니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5절)
자신들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바로 앞절인 1절로 4절을 보면요, 제자들의 그러한 요청이 이해가 됩니다. 1절로 4절을 보면, 어린이들을 실족하게 한다면 연자맷돌을 목에 매고는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하셨고, 또한 용서를 구하며 회개하는 자에게는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말씀을 듣고는 제자들은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했던 것입니다.
분부하신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는, 현재 가지고 있는 믿음의 분량으로는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께 믿음을 더해 달라고 요청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맡겨 주신 일들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믿음을 더해 달라고 하는 것은, 하등의 문제가 없는 것이고 칭찬 받을 만한 태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자들의 요청에 답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습니다.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6절 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6절)
제자들에게 있는 믿음이 겨자씨 한 알보다도 작다 라고 말씀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큼 밖에 안되는 믿음이라도 있다면, 충분하다 라는 말씀인가요?
많은 신학자들이, 후자의 내용이 맞을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깨닫게 됩니다. 믿음은, 인간적인 생각이나 세상의 풍조대로 이해할 수 없는 매우 신비로운 것임을 다시한번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문화는 어떻습니까? 더 커야 하고, 더 좋아져야 하고, 더 많아야 한다는 문화입니다. 모든 영역에 이러한 사상과 풍조가 만연합니다. The bigger, the better, the more culture 입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죠?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죠?
러시아 대통령 푸틴이 우크레인을 침공한 것도, 이전의 영광스러운 쏘비에트 연방을 회복하기 위한다고 하면서 전쟁을 정당화하고, 러시아 국민들에게 호소했던 것 아닙니까? 줄어들고, 작아지고 적어지는 것은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수 많은 살상을 합리화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에 대해서도, 이런 세상의 문화와 가치를 가지고 바라보고 행동한다 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믿음의 신비로움을 다 잃어버리고, 믿음을 마치, 내가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처럼 대합니다. 소모품처럼 또는 장식품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하는 유용한 물건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을 영적으로 다루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러한 생각과 태도로는 우리 안에 절대로 세워질 수가 없습니다.
믿음은 plus 가 아니라 minus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 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더 갖기를 원한다면, 빼는 것 부터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나타나고자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것으로는, 믿음이 세워지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는 것으로 보여질 수는 있어도, 신비에서는 오히려 멀어지고 말 것입니다. 믿음은 나에 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면서 동일하게 말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 3:30)
영어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He must increase, but I must decrease.
빼기 라는 것이 바로 그런 의미로 빼기 입니다.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것들을 내려 놓고 비우면서, 오직 하나님 만을 구하는 것이, 믿음의 시작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만을 갈망하는 그런 가난한 심령, 또는 어린아이와 같은 심령이 될 때에,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진주 처럼, 하나님만을 갈망하는 그 심령 속에 믿음이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겨자씨 한알 만해도 보화가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믿음을 더해 주소서 한대로 제자들은 분명히 더욱 굳건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온전히 자기 자신을 내려 놓고, 하나님만을 갈망함으로 말입니다.
누가복음에는 그러한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복음과 구원이, 화려한 왕궁이나 대궐 또는 신성한 성전 안에서 선포되어지고 누려지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전혀 있을 것 같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믿음을 가졌습니다. 예를 들어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닦은 여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눅 7:50)
이 여인을 성경은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눅 7:37)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는, 한 맹인이 예수님을 향하여 간절히 간구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눅 18:38) 하였습니다.
맹인이 보기를 원하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눅 18:42)
구원과 회복을 허락하시는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에 대해서 정말 작고 보잘것 없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That’s more than enough! 인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하나님의 놀라운 세계를 경험하게 하니, 신비 중에 신비입니다.
사람에게 큰 믿음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적절한 표현이 아닙니다. 크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작은 믿음이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작아질 수록, 하나님이 커지시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역사에 걸림돌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학자 N. T. Wright 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습니다.
It’s not great faith you need; it is faith in a great God.
동일하게 누가복음 10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눅 10:21)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인 생활, 믿음 생활을 제대로 한다고 하는 것은요, 더하기가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내려 놓고, 하나님만을 갈망하는 그런 영적인 모습이 모든 신앙생활의 근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을 만나는 encounter 가 많아질 수록, 우리의 믿음은 비록 겨자씨 만할지라도 생명으로 충만해져서, 우리의 존재가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오늘 본문 후반부에서 언급된 일들을, 담대히, 그리고 묵묵히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수종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비 아닙니까?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경험할 수 있게 되니 말입니다. 누가 인정해 주고, 봐줄 때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없을 때에라도, 하나님 때문에, 자신을 쓰임 받게 하려고,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Empowerment 가 되면서 오우너십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고, 군중에 휘둘리지도 않습니다.
주인의식이 있어야, 희생하고 수고하고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종의 모습을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수고가 더 이상 수고가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식입니다.
교회에서 제공하는 예배와 성경공부의 목적은 다른 데에 있지 않습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진주와 같은 믿음이 되어서, 우리 모두 주인의식을 가지고 공동체를 섬길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섬기는 일은 나를 풍성하게 하고, 전체를 풍성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도 우리를 섬기시려 이 땅에 오시지 않았습니까? 마가복음 10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우리 모두 이 신비로운 믿음을 통해서, 서로를 섬기며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사람들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마치 겨자씨가 자라서 나무가 되어, 수 많은 새들이 깃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슬라이드)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눅 13-18-19)
나는 비우고, 작아져서, 크신 하나님이 풍성하게 역사하는, 이 교회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