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25일
성경: 마태복음 10장 24-39절
제목: 두려워하지 말라
지난 주일에는 아시다시피 정전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날 아침 7시경에 교회에 와서 예배당을 한번 둘러보고,
102번지에 가서 예배 인도를 위해서 준비하고 있었는데, 7시 30분경에 갑자기 “펑”하는 소리가 나면서 전기가 나갔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본당에 가서 점검해 보니, 교회 건물도 전기가 나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102번지 주택으로 돌아오는 길에 길가에 있는 전봇대를 보니, 변압기가 달려 있는데,
아무래도 그것이 망가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토론토 하이드로에 전화를 해서, 교환원에게 교회 주소와 정전을 알려주니,
본인 컴퓨터에서도 정전이 되었음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주소는
교회 건물인데, 조금 있으면 예배를 드려야 하기 때문에, 빨리 기술자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사람이 대답하길, 사정은 알겠는데 일요일이라
장담은 못하지만 직원들을 빨리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곧바로 김인기목사님께 전화를 해서 상황을
알려드렸습니다. 그 이후에 일어난 수많은 일들은 다 말씀드릴 수 없지만, 제 안에서는 아드레날린이 엄청나게 펌핑이 되면서,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예배와 점심 식사에
대한 일들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언제 다시 전기가 돌아왔습니까? 예배 시작하기 5분전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찬양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엄청난 힘을 내게 합니다.
예배를 제대로 드릴 수 있을까?
빼먹은 것은 없는가? 밥은 누가 해오는가 등등에 대한 걱정과 염려는, 엄청난 힘을 내게 했습니다.
두렵기 때문에, 그
두려움을 상쇄하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더 하게 하거나, 또 어떤 것을 하지 않게 합니다. 이처럼 두려움은 우리의 삶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우리의 삶에 일부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빠졌을 때에, 두려움의 원인을 제대로 알고 다루기 보다,
그러니까, 두려움 때문에 왜 이런 행동을 하고, 왜 이런 말을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두려운 감정에 놓이기 싫어서 엄한
것들을 한다 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려움을 제대로 다루기
보다,
두려움을 회피하는 것이고, 거기에는요, 또
다른 부작용이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두려움이 싫어서, 회피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행동은,
선행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또는 종교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그리고 회피한 것이기에, 진정성이 없는 선행이고 종교적인 모습입니다. 그렇게 하는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식이 된다면, 그것은 두려움을 극복한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두려움에 굴복된 모습인 것입니다.
참 아이러니컬 하죠? 두려움이 주는 막강한 힘 때문에, 우리의 삶의 전반적인 모습에는 열심으로 가득찰 수도 있다 라는 것입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도
넘칠 수가 있습니다. 밤을 세워서라도
일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지, 홀로 있을 때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에 대한 묵상이나 고찰을 하기 보다, 두려움을 상쇄하기 위하여 소모된
아드레날린 때문에 발생한 허탈감을 채우고 달래기 위해서, 유흥과 쾌락으로 자기 자신을 마비시키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실체입니다. 그런 삶은 요행을 바라는 삶이고, 무책임한 삶입니다. 진리에서
멀어진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있는 마태복음 10장을
보면요, 초두에서는,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부르신 후에,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데, 그들이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이르러서는, 그들에게 엄청난 핍박과 환난이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의 공동체는 신앙으로
인하여 극심한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세 번에 걸쳐서, “두려워하지 말라”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26절: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28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31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상당히
radical
하고 급진적인 말씀입니다. 가족 간에 불화가 있어서 원수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가치관의 상충이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죽음 마저도 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정치, 종교지도자들에
의해서 말입니다.
이런 두려움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두려움과는 분명 차원이 다른 두려움입니다.
북미에 살고 있는 우리 중에 어느 누가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목숨의 위협을 받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두려움에 대해서 다룰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두려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먼저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그리고
누구를 두려워하는지를 알 때에, 그 민낯을 볼 때에,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두려움은 무엇에
대한 두려움입니까? 한번 지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 때에 그것이 여러분을 두렵게 하겠습니까?
우리가 경험하는 두려움은 대부분, 배척에
대한 두려움이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 입니다. 그러니까, safety 나 security 가 없어질까봐
하는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요,
죽음이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 라는 것입니다. 생존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만을 두려워 하라 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만을 두려워할 때에,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을 두려워할 때에, 우리는 가장 중요하게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real 해질 때에, 우리는 두려움의 실체를 직시할 수 있고, 다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8절 말씀이 바로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28절)
육체적인 죽음, 정신적인
죽음보다, 영적인 죽음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이고, 이는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럴 때에, 육체적인 죽음, 정신적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에스더 왕비가 바로 그것을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화답하여 이르되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에 4:15-16)
그런데 누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할 수 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 있는 사람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서,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경외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귀한 분이시니, 전전긍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만을 두려워할 때에,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사랑 안에 있는 힘이, 두려움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요일
4:18)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십계명 중에 첫번째 계명인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주석을 남겼습니다. “We should fear, love and trust in God
above all things”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라고요. 이 말은요, 우리가
만약 하나님 외의 것을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신뢰한다면 그것은 우상 숭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외의 것을 두려워
한다면, 그것은 우상 숭배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래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안하고 있습니까? 비록 그런 것들이 종교적인 행위, 열심, 또는 선행으로 나타날지라도, 진실에서 떠나고 하나님을
떠나 있다면, 이미 우리 영혼은 죽은 것과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두려워하고,
신뢰하십시다. 그 분만을 경외하십시다. 그럴 때에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게 될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죽음도 마다 하지 않는 제자도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독일 나치 정권에 저항했던
본회퍼는 그의 책 The Cost of Discipleship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But they must
overcome the fear of death with the fear of God. Those who are still afraid of men have no
fear of God, and those who have fear of God have ceased to be afraid of
men.”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여전히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본회퍼는 결국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다가, 나치
정권에 의해서 목숨을 잃었지만, 그의 생명력 넘치는 메시지와 외침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영혼에 큰 울림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죽음의
문제와 죽음의 두려움이 다음과 같이 해결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롬 6:8-9)
“지금 죽어도 괜찮습니다” 라는 고백이 우리에게 있는 것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우리가 동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과 죽음은 하나님 손에 있음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삶에 도전과 환란과 어려움이 있어도, 우리가
평강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것도, 그래서 마음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감사가 넘치는 것도, 우리가 하나님 손에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황과 조건에 관계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된 하나님의 사랑안에 우리가 거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두려움의 현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극복하여, 행복한 제자도의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