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1일 주일
성경:
사도행전 4:5-12
설교:
베드로는 담대하였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크리스챤들은 어떠하였는가 하는 것을 지금 수요일에 연구하고 배우고 있습니다. 기독교 운동의 리더가 죽은 후에 그 운동은 어떻게 되었는가?
어떤 운동이던 그 운동의 강한 주동자가 사라지면 그 운동도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죽였던 것입니다. 지도자를 죽임으로 그 운동을 죽이려고 하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기독교 운동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그 운동은 더 커지고 더 강해졌습니다.
더 강하게 말씀은 선포되고 퍼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활동 반경이 아주
작았습니다. 주로, 유대 땅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 사이를 다니시면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이 운동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로마 왕국을 바꾸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다른 것 없습니다. 바로 성령님이셨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다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의 리더인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을 받았을 때, 그들에게 새로운 모멘텀이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살아계신 동안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한복음 16:7)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요한복음 14:12)
예수님께서 살아계시는 동안, 제자들은 아주 연약했습니다.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용기가 없었습니다.
깨달아 아는 것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종종 그들을 보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내가 얼마나 더 오래 너희들과 있어야 하겠느냐. 왜 깨닫지 못하느냐?
그들은 늘 의심을 하였습니다. 늘 자기 자신의 영광을 구했습니다.
늘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보는 베드로는 아주 다릅니다. 베드로는 담대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사도행전 4:8)
담대하게 그는 외칩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사도행전 4:10)
그는 담대했습니다.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믿었습니다. 자기 자신으로 충만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하였습니다.
가장 높은 법정이고,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로 결정했던, 그 법정 앞에 그는 서 있었고 죽음이 그의 눈 앞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담대했고, 차분했고,
자신에 넘쳤습니다. 어떤 것도 그를 흔들지 못했습니다. 그 베드로가 바로 예수를 세번이나 부인한 그 베드로 맞습니다. 산헤드린은 말할 것도 없고, 작은 어린 소녀 앞에서도 벌벌 떨던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마태복음 26:69-70)
오늘 우리는 아주 다른 사람을 봅니다.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봅니다. 무엇이 그를 변화시켰습니까? 바로 성령이십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사도행전 4:8)
오직 성령으로써만 사람이 변할 수 있습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바로 성령을 받았고 성령에 충만했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에게 나타난 구체적인 증거는 바로 담대함, 용기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성령의 도움으로 그들 속에 있는 두려움을 그들은 이길 수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죽음도 그들을 두렵게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힘이 있고 권력이 있다고 하는 왕이나 권세자들도 그들을 협박하지 못했습니다. 죽음도 그들을 위협하지 못했다면 이 세상의 어느 것도 그들을 위협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그것이 바로 능력입니다. 무엇을 잘 하는 것이 능력이 아니라,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능력입니다. 같은 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베드로와 요한의 이야기 입니다.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사도행전 4:19)
그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하나님이었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그것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것 아닙니까?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마태복음 10:28)
자기 스스로 이를 악물어서 담대해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에 담대해진 것입니다.
성령이 여러분 속에서 역사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령 받은 증거입니다. 죽음의 두려움마저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첫 순교자인 스데반은 담대함을 가지고 자기의 죽음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사도행전 7:54-55)
스데반 뿐만 아니라, 성령을 받은 모든 성도들이 그런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두려움을 극복했습니다. 담대하게 예수님의 능력을 선포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크리스챤으로서 살면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두려움을 가지고 살지 마십시오. 의심을 가지고 살지 마십시오.
애굽 부모를 둔, 미국의 작가인 Suzy Kassem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Doubt kills more dreams
than failure ever will.
실패가 우리의 꿈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의심이 우리의 꿈을 죽인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다시 일어나서 시도해 보십시오.
싸워야 합니다.
한국 LG의 염경엽 코치가 LG로 가면서 이런 문구를 잠실 스타디움 통로에 붙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두려움과 망설임은 나의 최고의 적이다!
선수들은 라커룸을 드나들며 항상 이 문구를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겼습니다.
그전까지의 LG는 위기만 당하면 무너지고, 한 번 무너지면 일어서지 못하는 팀이었습니다. 그는 이 두려움을 없애야 우승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뛰는 야구를 선수들에게 주문했습니다. 정규시즌에 어떤 팀보다 많은 166개의 도루를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실패도 많아서 101번의 실패로 가장 많은 도루 실패를 하였습니다.
그의 작전을 놓고 사람들은 많은 비판을 하였지만 그가 원했던 것은 도루가 아니라, 바로 죽더라도 공격적으로 뛰다 죽는 팀의 분위기를 만들기 원했습니다. 두려움으로 물러서는 팀이
아니라, 두려움을 극복하고 죽기까지 뛰는 팀을 그는 원했습니다. 위기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팀을 바꾸어서 86승을 했는데 그 중에 42번이 역전승이었습니다.
안전하게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두려움 때문에 물러서지 마십시오.
용기를 갖고 사십시오.
용기를 갖고 도전하며 사십시다. 용기를 갖고 뛰는 삶을 사십시오.. 여러분에게 주어진 소명을 감당하십시오.
이것이 이사야 선지자가 하신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1:10)
시편 기자는 자기 자신을 도전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편 27:1)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셨습니다.
이제 담대하게 예수님의 능력을 선포하면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