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31일
성경: 고린도전서 15:1-11
설교: 굴러진 돌
Happy
Easter! 오늘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영이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허락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나셨습니다. 죽음이 그를 삼키우지
못했습니다. 죽음이 그를 가두어놓지
못했습니다. 죽음이 돌로 막힌
무덤 속에 그를 묶어놓지
못했습니다. 그 돌은 굴려졌습니다.
(Rolled Away!)
죽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했습니까? 그저
우리의 생명을 앗아간 것만이
아닙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가져 왔습니다. 우리 속에
두려움을 만들어 냈습니다.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두려움입니다.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사람들은
두려움만 생각합니다. 다른 것은
보지도 못하고 생각도 하지
못합니다.
죽음이 죽은 자들을 큰 돌로
그 앞을 막아 가두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도 그들의 눈 앞에
큰 돌을 두어 그들을 가두어
두었습니다. 그 큰 돌이
바로 두려움입니다. 그 돌이
우리를 어둠 속에 눌러
있게 합니다. 그 돌이
우리를 막고 있기 때문에
어둠 밖으로 나오지 못합니다.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경험해야 하는데 그것을
경험하지 못하게 두려움은 우리를
방해합니다. 삶의 환경을 디딛고
일어서야 하는데 두려움이 그것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 큰 돌이
굴려졌습니다. 제거 되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
주님은 돌을 치우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요한복음 11:38, 39)
같은 모양으로, 예수님의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굴려졌습니다.
마가는 그것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마가복음 16:1-4)
돌이 굴려 졌습니다. 돌이
제거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저 육체적인 장애물이
사라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에게 이 육체적인 장애물이
사라지는 것이 필요 없는
일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것에
구애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이 굴려졌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것은 바로
자유함이 주어졌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으로부터의
자유함, 죽음의 공포로부터의 자유함을
뜻합니다.
두려움이 치워 졌습니다. 두려움이
제거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은
그저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바로
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더이상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두려움을 갖고 살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더이상 인생을
두려움의 눈으로 바라볼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움이 제거될 때, 여러분은
여러분의 현실을 더 정확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현실이
더 밝게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큰 돌 뒤에 갇혀져 있을 때에는
모든 것이 어둡게 보였습니다.
모든 것에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돌이 굴려졌을
때,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갖고 살 수 있고,
또한 강한 능력을 갖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새로운 현실입니다.
두려움은 죽음이 우리 인간의
영혼에게 가져온 가장 큰 damage였습니다.
영혼 깊숙한 곳으로부터 우리를
파괴하고 망가뜨린 것이 바로
이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을 통하여 죽음은
우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 앞에 커다란 돌을
놓고 죽음은 자기 맘대로
우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돌이 굴려졌습니다.
돌이 제거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의 힘찬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고린도전서 15:55-56)
여기에 두려움을 보십니까? 더이상
두려움이 바울의 삶의 중심에서
그를 주장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를
죽음에서 살리신 하나님을 그는
믿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가지고
죽음에 맞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더이상 나를
두렵게 하지 못할 것이다.
더이상 그 두려움으로 나를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강하게 외쳤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아주 다르게
보셨습니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피해야만
하는 것으로 죽음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죽음을 모든 것의
마지막이고 온전한 파괴를 가져오는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음이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보셨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죽음을 새롭게 정의
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며 하신 주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24)
죽음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보여 주셨습니다. 모든 죽음이
파괴를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죽음이 헛된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열매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음을 사용하셔서
우리 모두에게 자유함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좋은
소식, 복음입니다.
3절과
4절에서 그 복음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린도전서 15:3, 4)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것의 마지막이고 온전한 파괴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바로 자유라고 하는 열매를
가져왔습니다. 죄로부터의 자유함, 죄에
대한 처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함을 가져왔습니다. 더이상 처벌을
두려워하며 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
속에 있는 두려움을 제거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두려움으로부터 치유함을
받게될 것입니다.
우리는 더이상 두려움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보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부족하고, 못났고,
연약하고, 모순 투성이인 사람으로만
우리 자신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처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으로써만 우리 자신을 볼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두려움이 제거 되었을 때,
우리는 이제 은혜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
사도가 본 것입니다.
그는 분노에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의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폭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했었던 것이지요. 그의 분노,
자기의 의, 폭력, 미움이
그를 삼켜 먹어 버렸습니다.
그는 두려움으로 자기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이
사라졌을 때, 그는 자기
자신을 새롭게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고백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고린도전서 15:10)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가 자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해,
자기 자신을 이제 두려움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눈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자기 본연의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는 길을
잃고 살았지만 이제 그 길을
찾았습니다. 돌이 굴려졌습니다. 두려움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발견한 후에
한 고백이 이것입니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린도전서 15:10)
두려움이 사라졌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두려움이 여러분의 삶에서
사라져 보리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전에 갖지 못했던
힘이 솟아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삶의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16:33)
두려움은 사라지고 세상을 이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이긴다는
것은 성공한다는 것이 아니고,
바로 죽음의 권세를 이긴다는
말입니다. 어두움의 권세, 악을
이기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불의와
거짓된 것을 이기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돌은 굴려졌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담대하게 사십시오.
그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