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2025년 10월 5일)
누가복음 17장 5-10절
“작지만 진실한 믿음”
오늘
본문은 어려운 본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한 사람들도, 오늘 본문의 이야기들이 익숙할지는 모르지만, 그 뜻이 진정 무엇인지 잘 모를 것이라고 짐작해 봅니다. 특히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자, 예수님은 대답하시길,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라고
하는 대화는요, 우리를 더욱 더 미궁 속으로 빠지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에 대해서 많은 질문들을 하게 됩니다.
“믿음”이라고 말할 때에, 여러분들에게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은 무엇입니까? 귀한 것이고 생명줄과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맞습니다. 믿음이 있을 때에, 우리의 삶이 얼마나 풍성해지는
지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다음 주일이 추수감사주일인데,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삶은, 믿음이 있을 때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믿음하면, 또 한편으론, 두려움과 불편함이 있습니다. 왠지 이루지 못할 것 같아서 그 길로 나서는 것을 주저하게 됩니다. 이처럼, 믿음에 대한 반응이 긍정과 부정이 동시에 존재하는데,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믿음에 대해서, 우리에게 착각과 편견이 있다 라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 뒤에는, 이러한 착각과 편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에 대한 착각과 편견은 대부분 이 세상 풍조에 영향을 받았음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의 가치와 기준은, 다음과 같은 구호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더 크게, 더 많이, 더 빨리” 입니다. 미국의 MAGA라는 정치적 구호도, 이러한 세태의 풍조를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풍조가 믿음에 대해서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해서도 더 커야 하고 더 많아야 한다고 하면서, 아무런 저항 없이 자연스럽게 결론 짓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업적과 성과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 대한 편견과 오해로, 희생자로 피해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믿음의 실체를 모르고, 소중함도 경험하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요즘의
세계 정세를 보면, 어느 때보다 폭력적이 되었고, 비인간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전쟁과 갈등과 대립이 팽만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고통 받고 있습니다. 세상이 오히려 뒤로 후퇴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지난
주 수요예배에서 우리는 창조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을 잘 다스리고, 서로 돌보고 조화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과 바램은, 이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
것 같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사람들이, 그리고 하나님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속성과 뜻에 정반대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예수님은
그래서 누가복음 18장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눅
18:8)
결국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분명한 것입니다. 그들의
삶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를 단순하게 비교할 수 없지만, 다음과 같이 구별할 수 있겠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Inward,
Private and Genuine 의 속성이 있습니다. 즉, 내면의 세계를 살피는 사람이고, 하나님과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고, 그래서 진실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믿음이 없는 사람은, 늘 다른 사람의 시선에 급급하고,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지 않으며, 그래서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이리 저리 바람부는 대로 살아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에서 사도들이 “우리에게 믿음을 더 하소서” 라는 요청은,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들에 대한 제자들의 현실적인 반응이었습니다. 1-4절을 보십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니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눅 17:1-4)
이것이
오늘 본문 바로 직전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엄청난 말씀 앞에서, 분부하신 것들을 자신들이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하면서 예수님께 도움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더하소서”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은 6절에 나오는 그대로였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눅 17:6)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에 대한 선입견과 착각을 발견하고 내려 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에, 우리의 판단에, 우리의 정서에, 그리고 심지어 우리의 믿음에도, 얼마나 더 많이, 더 크게, 더 빨리 라는 것이 흐르고 있는지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인지 되물어 봐야 합니다. 그런 것들이 진정한 믿음과 고귀한 믿음을 갖게 하는데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깨달어야 합니다. 보여주기 식의 믿음이 아니라, 성과 위주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서
비롯된 믿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믿음은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런 믿음이 여러분께 있다면,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제자들이 믿음을 더하소서 라는 간구에는,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할 수 없으니, 주님, 도와 주세요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외쳤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 주소서” (막
9:24)
그럴
때에 어찌 주님께서 믿음을 더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믿음에는 크고 작고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있는 것이고, 없으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양이 아니라
질에 관한 것입니다. 금으로 치면 24K가 아니라 순금이라는 말입니다. 그 믿음이, 위대하고 크신 하나님과 연결이 되느냐
안되느냐가 더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대한 믿음이 아니라, 위대한 하나님을 믿는 그
어떤 믿음이라도 있다면 충분하다 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통로가 되고, 연결이 되는 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제한된
세계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세계를 꿈꾸게 하고 맛보게 해 줍니다. 물리적으로 제한된 세상에서 영원한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게 해 줍니다. 믿음이 없이는 절대로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믿음과 보는 것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요
11:40)
이런
의미에서, 믿음은 유리창과도 같다 하겠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위대하고 크신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 유리창이
크든 작든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해도, 그 안에 생명이 있고, 진실이 담겨져 있고, 헌신이 있다면, 반드시 귀하고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는 미약해 보일지 모르나, 주님 보시기에는 귀하고 귀한 것입니다.
설교학으로
저명한, 신학자
Fred Craddock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신 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두 가지의 “만약” 즉 If 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만약 너희에게 믿음이 있다면”이라고 한 것은, 가정법이 아니라, 그래서 믿음이 없음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Affirmation, 즉 확언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치 다음과 같이 말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믿음이 없다고 하느냐? 왜 믿음이 작다고 하느냐? 아무리 작아도
네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지 않느냐? 그 믿음을 가지고 해 보아라. 그러면 그 어떤
것이라도 옮기는 것은 내가 다 해 주겠다”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자제들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으니 그것을 알고, 그 믿음을 살아내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은 주님이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런 믿음 주심을 감사하고, 그 믿음대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뿐입니다.
근래에
한 가지 경험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준비하고 해 나갈 때에,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씨앗을 뿌리듯이, 그리고 문을 두들기는 심정으로
해야 할 것들을 해 나갔습니다. 아주 작은 것이지만 말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상상치도 못할 결과를 친히 마련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을 붙여 주시고, 우리 안에 기쁨과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할지라도,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작은 누룩과도 같아도,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것에 집중하고 진실하게 순종하십시다. 그 안에 있는 생명이 꿈틀거리고 퍼져 나갈 것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분의 뜻을 알고, 살아가는 이 작은 삶이야 말로,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주님의 제자의 모습입니다. 허영을 버리고, 또한 게으름을 버리고, 진실과 겸손을 늘 놓지 마십시다.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주님께서 그 날에 이루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주신 귀한 믿음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십시다. 영적인 삶을 살아가십시다.
오늘
본문 두 번째 부분에 나오는 종에 관한 이야기도, 믿음과 직결된
이야기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고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종이 되어도 감지덕지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믿음의 크기가 중요하지 않고 오직
그 내용과 그 질이 중요한 것처럼, 우리가 하는 섬김의 일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떠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느냐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남들 앞에서나, 나 홀로 있을 때에도 늘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종된 섬김과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늘 무익한 종일 뿐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무슨 대가를
원치 않고, 남들이 알아주는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 자체를,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섬기지
않을 때가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을 섬기는 사람은요, 모든 자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의 모습이 아닙니까?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겨지씨 한 알 만한 믿음이지만,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정금보다
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맡겨드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만을 의지하는 여러분들의 진실한 믿음을 기쁘게 받으시고, 나머지
모든 영역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