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2025년 9월 14일)
누가복음 15장 1-10절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저희가
1991년에 캐나다 토론토에 이민 왔을 때에는 집에 자동차가 당장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중 교통 수단을 한 1년 넘게 사용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하철을 타고 다닐 때에, 방향감각이 별로 없었습니다. 영어로 westbound, eastbound라고
하는데, 그것이 어느 방향인지 감이 잘 오지 않았습니다. 동서남북이 어디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플랫폼 정반대에서 다른 방향으로 가는 전철을 탄 적도 몇 번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영어도 잘 할 줄 몰랐으니,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그 때에 경험했던 당혹감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은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들도 이곳에 살면서 길
잃고 헤매였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최근에
미국 조지아 주에서 한인 근로자 삼백여명이 구금이 되었다가 풀려난 소식을 듣게 됩니다. 전문 인력들로서, 미국 땅에서 가동될 공장을 셑엎하고
점검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이민세관국에서 나와서 수갑과 족쇄를
채워서 수용시설에 구금했던 것입니다.
한인
근로자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이역만리 파견 나와 일하다가 미국
정부의 강압적인 심문 검색과 체포에 망연자실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모두 한국에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지만, 그들이 수용소에서
지낸 8일의 시간은 트라우마가 되었다고 듣게 됩니다.
개인적인
경험과 집단적인 경험 이외에도 국가적으로 길 잃어버린 경험도 우리 민족에게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암울했던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가인 윤동주는 나라를 잃은 현실을 살면서 젊은이로서 그의 심정을 “길”이라는 그의 시로 표현하였습니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 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1941년에 지었다고 하니, 중일전쟁이 한창이었던 시기였고, 그는 일본 유학을
준비했던 시기였습니다. 그의 방황과 죄책감이 보이지만 또한 소망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추스리고 있음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길 잃어버리게 된 원인이, 자의에 의해서인지, 타의에 의해서인지 상관없이, 그리고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 경험은 외롭고, 힘들고, 두려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가지의 비유도, 잃어버린 양과 동전에 관한 비유입니다. 그런데, 잃어버린 양과 동전은 불특정한 사람을 뜻하나요? 아니면 특정한 사람을 뜻하나요?
1절을 보니 특정한 사람들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슬라이드)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1절)
세리와
죄인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회는 종교적인 잣대가 모든 것을 구분하고
결정하고 있었습니다. 율법과 종교의 체재에 의해서, 세리와 죄인들은,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배척 받았습니다. 그들이야말로
길 잃은 영혼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민자로서 그리고 유색인종으로
북미에서 받는 차별과 소외보다 더 심한 차별과 소외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2절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2절)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은요, 식구로 여긴다는 것과 같습니다. 식구라는 단어를 보면, 밥을 같이 먹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수근거렸던 것입니다. 사회질서에 어긋나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을 구원하길 원하는 매우 크신 분이시다 라고요. 사람이 만든 틀 속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개인화하고 집단화 한다면 그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방인의
사도라 칭하는 바울도 그런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 2:4)
우리
속담에,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 라고 하는데
그것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그 어떤 누구도, 또 그 어떤 이유와 원인에 의해서 길 잃어버릴 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끝까지 찾아내실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제
인너보이스 성경구절이 바로 그러한 하나님을 표현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 139-7-10)
어떤
이유에서든지, 소외되고, 차별받고, 그래서 길 잃어버릴지라도, 반드시 찾아내실 하나님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도 하나님은 목자가 되어서 잃어버린 양을 찾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 (겔 34:15-16)
하나님은
양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가만히 소극적으로
기다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한 마리라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는
분이십니다. 한 마리라 함은 모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도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나선 가장 극명한 예가 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잃어버린 양을 찾았을 때에,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그 양에게 야단치지 않았고, 허겁지겁 외양간으로 들여보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사람들을 불러서, 함께 잔치를 하며 기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다고, 그런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이런 사랑을 어리석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이에 비해 얼마나 계산적인지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열려지길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하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어떤 누구든지 잃어버린
자를 끝까지 찾으시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과, 죄인이 회개하는 것, 이 두 가지는 어떠한 상관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찾으심과 회개는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어떤 의미에서 같은 것일까요? 마치 동전의 양면이 되는 것일까요?
이러한
질문들에 여러분들도 공감할 줄로 압니다. 그래서 고민하고 묵상하다가
다음의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어떤 누구든지 잃어버린 자를
끝까지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자는, 회개하게 될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회개의
시작점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회개를 일으키는 원동력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없이 회개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할수록, 우리는
지난 날을 뒤로 한 채,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요, 그래서 치유된 사람은요, 결코 보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을 차별하고, 소외하고, 무시했던 자들 마저도 품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행복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용서함 받은 자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받아들이고, 함께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직전 구절은 14장 35절인데요, 다음과 같이 끝내고 있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눅 14:35)
그리고
오늘 본문 첫 구절은 15장 1절인데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눅 15:1)
소외되고
차별받고, 무시 받은, 사회적, 종교적으로 레이블이 붙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듣기를 원했다 라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들에게
들을 수 있는 귀가 주어졌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찾음 속에서
발견되어,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결론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회개하고
나니, 하나님께 돌아가고 나니, 나를 그토록 찾으셨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뒤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가 말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런
면에서 회개는, 세례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세례 받았다고 우리가 하루 아침에 성인군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겠다는 결단이고, 이제는
십자가를 향해서 걸어가겠다는 새로운 방향성이 생긴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회개가 필요한 사람입니까? 누가 잃어버린 자입니까? 누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발견되어져야 하는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들도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이 말은, 또한
우리 모두가 회개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의
바리새는 원어로, to separate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구별하겠다고 한 것이,
하나의 특권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고 소외시키고, 억압하는 권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양날의 검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듣고,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서 하나님 품에 안겨, 고침을 받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삶이, 폭력, 미움, 갈등에서 풀려 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들을 찾으시는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