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2024년 2월 11일)
마가복음 9장 2-9절
고난 없이 영광도 없다
오늘 본문은 일명 “산상변화”라고 해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모두 기록된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모든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영광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이 드러나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일상에 일어나지 않는 기이한 현상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높은 산에서,
예수님이 변형되었고, 그의 옷이 광채가 났으며, 유대교에서 가장 존경받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하는,
이런 광경은, 그저 놀랍고 기이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광경입니다. 이 광경을
가까이에서 보았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들에게는 너무나 놀랍고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구름이 덮이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라고 하는 소리까지 듣게 되니, 이들은 혼비백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여기 있는 것이 좋겠다”
하면서 초막 셋을 짓자고 한 것도, 그 이유가 다른 데에 있지 않고, 몹시 무서웠기 때문이라고 오늘 본문은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6절)
그만큼, 경이로운 광경이고
경험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셨는데,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질문하게 됩니다. 9절입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9절)
신비롭고 영광스러운 광경을 직접 보았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경험 아닙니까? 심지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더더욱 놀라운 경험입니다. 그런데,
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을까요? 마치 병주고 약주는 식입니까? 아니 약주고 병주는 식입니까?
저 같으면 온 동네방네 다니면서, 내가 보고 들은 것을 자랑하고 다녔을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하다 라는 것을 은근히
나타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니, 실망했을 것 같고, 많은 질문들을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에게 경고하신 그 이유가 진정 무엇이었을까 더욱 질문하게 됩니다.
혹시 예수님의 사역에 방해가 될까봐 그랬을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본 장면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고,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무슨 허황된 소리를 하냐고 무시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을까요?
그것은 고난 없이 영광도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보고 들은 것이 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한 후에야 더욱 그 가치를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예수님의 영광은,
고난까지도 품은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영광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갈보리 언덕의 부활은, 겟세마네의 고난과 씨름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영광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영광과 고난을 대하는 태도는 어떻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은,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는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것만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사람들이 다 알아주고, 칭송하는 것만을 하려고 하거나, 그런 시간과
장소에만 나타나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래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런 홀로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해야 하는 것들은, 잘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런 것들이 아예 눈에 보이지도 않고, 봐도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만약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면, 그것은 영광만을 구하고 있는 것이지, 고난에 대해서는
어떡하든지 회피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 같고, 지혜롭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생각은 우리들을 매우 연약한 사람들이 되게 할 뿐입니다. 그런 생각과 태도는,
예수님의 영광과 고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고요, 경험하지도 못한 것이고요, 믿지도 않는 것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영광만을 구하고, 고난을 피하기만 할 때에,
우리는 결단코 영광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영광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영광만을 구하는 것이고,
그것은 우상 숭배와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다시 살아날 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셨는데, 이 세 제자들은 과연 예수님의 말씀을 지켰을까요? 이 또한 매우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당장은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그들이 경험한 영광스러운 광경에 대해서 함구했을
것입니다. 물론, 속에서 질문이 일어났겠지요.
갈등도 일어났을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도대체 산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냐고 질문할 때에도, 이들은 말을 얼버무렸을 것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종종 다른
제자들 사이에서도, 서로 눈으로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을 것입니다.
“끝까지 지켜 보자” 라고요.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가슴 깊이 담아 두고,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에는, 이 셋은,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실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 짧은 삼일의 시간을 노심초사
기다렸을 것이라고 짐작이 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이 세 제자들에게는 또 다른 차원의 고난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만이
통과해야 하는 고난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더욱 깊이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과정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예수님에 대한 막연한 생각이, 갈아 엎어지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작은 세계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크신 세계가 눈 앞에 펼쳐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과한 후에,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할 때에, 그들은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눈이 뜨여져서, 예수님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이 세상의
구원자 되심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 또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가는 진정한 제자도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보다 더 귀한 영광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에게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난 없이,
영광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영광과 고난에 대해서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롬 8:17)
이런 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함구령을 내리신 것은, 그들을 위함인 것을 알게 됩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들 속에
무언가를 보셨던 것입니다. 이 셋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는,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서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영광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에, 고난도 마다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자들에게 힘이 되고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영광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죽음의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편 23편의 고백이고 내용이 아닙니까? 결국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살려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 킹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 있습니다. Howard Thurman이라는 사람인데요, 그가 쓴 책 “Jesus
and the Disinherited” 라는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책 이름의 뜻은 “예수와 유산이 없는 자들”
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통해서 확신한 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반드시 가난한 자, 유산이 없는 자, 소망이 없는 자 들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러한 확신을 위해서 그는 자신의 삶을 헌신했고, 마틴 루터 킹의 멘토가 되어서 사회정의와 인권 운동을 위하여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마음을 깨닫는 자는,
그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 외치는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며,
그 또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는 의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영광된 날까지, 우리의 삶에 그 어떤 고난이 닥쳐온다고 해도, 그 고난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나아가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감당할 힘을 주실 것입니다. 신앙 때문에
임하는 고난도 우리에게 유익함이 되는 것입니다.
불 같은 시험도, 우리가 정금 같이 나올 수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찌끼들이 다 타버리게 되길 바랍니다. 그런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증인이 되는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