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2023년 5월 21일)
요한복음 17장 1-11절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에서 일명 고별 설교 중에서도
거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제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예수님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유월절 만찬을 제자들과 같이
드셨고, 여러가지 대화들을 마친 후에, 예수님은,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도의 한 글자 한 글자를 빠짐없이 옆에서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너무나도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에서 그려낸 예수님은, 늘 때를 알고 그 때에 맞게
행동하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을 떠나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야 하는 때가 왔을 때에, 예수님이 하실 수 있는 것은 제자들을 위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기도는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위한 기도의
주제는 무엇이었나요? 그것은 제자들이 하나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절인 11절을 보면, 제자들이 하나됨을 위해서 기도하셨음을
알게 됩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 17:11)
그런데, 여기서 질문하게 되는 것이, 왜 제자들이 하나가 되게 해
달고 예수님은 기도하셨을까? 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하나가 아니었다 라는 말인가요? 아니면, 배신할 유다를 인식하고 더 이상
damage
가 일어나지
않게 하길 위해서 일까요? 왜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하나됨”이라는 것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얼추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거나 직장생활을 할 때에, 그리고 교회 공동체에서도 늘 하나됨을 중요시
여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분산되고 갈라지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될 때에, 자원을 효율적을 사용할 수 있고, 하나가 될 때에 일을 하더라도 추진력으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전에 군대 생활 때가 생각이 납니다. 하나됨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생존과 국가의 존속이 달린 문제입니다.
전도서 기자도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 4:12)
그런데, 하나됨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다른 어떤 것보다 힘을
이용하거나 권력을 사용해서, 하나됨을 이룰 때가 많다 라는 것입니다. 사랑, 존중, 존경 등이 없는 하나됨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목적을 위해서 과정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부부의 관계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를
억누르고 흡수해 버려서 하나됨을 이룬 들,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좋은 것이 나오겠습니까?
만약, 그러한 상태가 당연하게 여겨진다면, 그것은 현재 건강하지 못한 관계를
가지고 살고 있다 라는 반증이고, 하나됨은 그저 표면적인 하나됨이지, 속에서는 여전히 강자와 약자의 비극적인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원하시는 하나됨은, 우리가 알고 있고, 경험하는 하나됨과는 다른 차원의
하나됨입니다. 하나됨의 모양은 같다 할지라도, 하나님됨을 이루는 근간이 다르고, 역학도 다르고, 결과도 다릅니다. 예수님이 당부하는 하나됨은, 학연, 지연에 의한 것도 아니고, 권력에 의하여 흡수된 하나됨도
아니라, 영적인 하나됨입니다.
3절을 보면, 하나됨을 이룰 수 있는 조건이
나오고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요한복음에서 “안다” 라는 것은 매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헬라어로 ginosko 라고 하는데, 그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만 커서, 말로만 아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지식은 사도 바울이 이미 고린도전서에서
다루었습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전 8:1)
사랑 없는 지식은 아무런 쓸모가 없고, 설 자리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안다” 도 마찬가지입니다. 쌍방 간에 깊은 관계를 의미하는
앎입니다. 그런 사랑의 관계를 통해서 경험된 앎입니다. 그래서 존중하고 이해하고 가까이 있고 싶은 경지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우리 각자가, 하나님을 먼저 깊이 알고 사랑할
때에, 공동체는 하나됨을 이룰 수 있는 것이지 다른 방법과 길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됨을 이루려고 하면서, 다른 것들을 생각하지도 말고
시도하지도 마시길 바랍니다. 친교를 자주하거나, 식사나 차 한잔 같이 하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거기까지 입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하나됨을 이루려고
하지 마시고 기대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그 어떤 영향력으로도, 하나됨을 이룰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 하나됨의 겉 모습은
이룰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됨은 오직 각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런 깊은 관계가 우선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하나되게 하셔서, 그 하나됨은 매우 자연스럽게
그리고 왕성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전에도 보여드린 그래프 입니다. 각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께 날마다 나아가는 영적인
여정이 있을 때에, 그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가까워지고 깊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또한 하나님이 어떤 것보다, 그러니까, 나 자신을 포함하여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 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공동체를 허락하여 주시고, 하나됨의 축복을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다음 주일에 당회원 선거가 있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늘 나아가는 신앙 여정이
있는 교우를 뽑아 주시길 바랍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그런 영적인 교우를 뽑아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기에, 이런 말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Love begets love.
사랑은 사랑을 낳는다 라는 말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이야말로 가장 영적인
것입니다.
하나됨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고, 포용할 때에 가능합니다. 이것이 사랑이 실제로 역사하는
모습아닙니까? 여전히 나의 주장, 나의 어젠더가 살아있으면, 하나됨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날마다 나아가, 그 사랑 안에 거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더 이상 싸우지도 않아도 되고, 군림하지 않아도 되고, 나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안식과 평안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Our heart is restless until it rests in you (God).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안에 쉬기 전까지 쉬지 못합니다.
하나님
품 안에 거하기 전까지, 우리는 늘
그 안식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안식은, 하나님 품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품 안에 거할 때에, 우리는 하나됨을
이루어가는 여정을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교회는 하나가 되어서, 예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이 하나되어야 함을 위해서 기도한 목적입니다. 이
땅에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가 하나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교회
공동체를 정의 내릴 때에,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합니다. Church that gathers and church that scatters.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 라고요.
교회는
모일 때가 있습니다. 예배드리고
말씀 배우고, 성도의 교제를
하러 모여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으로 나아가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의식의 전환도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번에
단기 선교로 마다가스카르에 간 것도, 흩어지는 교회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려고 갔던 것입니다.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눌 때에, 그곳에서 하나됨을 경험할 수 있었을 줄로 믿습니다. 8월초에 있을 원주민 선교도 동일합니다.
하나님
앞에 모인 자들이, 하나님의 품
안에서 안식함으로 변화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러 가게 될 것입니다. 비록 문화와
인종과 언어가 달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다가갈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곳에서도 하나됨을 이루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럴
때에, 더 이상, 인간의 캐더고리가 존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이 높임을 받는 하나됨이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럴 때에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요일 4:12)
우리
교회 공동체가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처럼, 하나가 되어서,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역을 감당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