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2023년 5월 14일)
요한복음 14장 15-21절
“부모와 같은 하나님”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지난 주일 설교 본문 바로 뒤에 이어서, 나오는 본문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 본문은 요한복음 14장 1-14절이었는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 말씀을 하신 일명 farewell discourse 즉 고별 설교라고 불리는 요한복음 14장부터 17장까지에서 첫 부분에 해당합니다.
예수님이 곧 제자들을 떠나실 것인데, 그래서 제자들은 걱정하고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미래에 관해서 근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살도록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김목사님은, “내일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우리 앞에 두 갈래 길이 있는데, 믿음을 가지고 밝은 삶을 사는 길과 아니면 불안함을 갖고 어두운 삶을 사는 길이 있으니, 믿음을 가지고 선택하며 살자고 설교했습니다.
오늘은 Mother’s Day이고 어버이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본문을 읽고 묵상하면서,
다른 어떤 것 보다도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제자들을 홀로 남겨두고 자신이 걸어가야만 하는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될 때에,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헤아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홀로 남겨두고 떠나는 부모와
같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의 마음은 그래서 아리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우리 부모된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자녀들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해 주려고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녀들과 함께 있을 때에도 그렇게 하지만, 자녀들과 떨어져
있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양주동 작사, 이흥렬 작곡의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노래의 가사가 바로 그런 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 속엔 온가지 소원
어머님의 마음 속엔 오직 한 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식 위하여
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
이 땅에 그 무엇이 거룩하리오
어머님의 사랑은 그지없어라
어떤 교우가 그러십니다. 오래전에 이민 와서 장사하면서, 내외가 교대로 또는 함께 가게를 하루 종일 보았는데, 그 기간 동안 집에는 자식들만 남겨져서 방치되었다고 하면서, 지금 와서 생각하니,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하셨습니다. 부모의 마음은
이처럼, 늘 후회스럽고 미안한 마음일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 때문이 아닙니까?
예수님도 당신이 없는 빈자리로 인해서, 근심하고 두려워할 제자들을 생각하면서, 사랑에서 비롯된
약속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매우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18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8절)
제자들과 맺은 인연은 혈연과도 같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자신이 다시 올 때까지, 성령을 본인 대신 보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6-17절)
예수님이 보내시기로 한 성령 보혜사는, 헬라어로 paraklyatos
라고 합니다. 그 뜻은 영어로 몇 가지가 됩니다. Intercessor, Consoler, Advocate, Comforter
입니다. 즉 중재자, 위로자,
옹호자, 위안자 입니다.
그런데, 원어의 문자적인
뜻이 눈에 들어옵니다. Come
alongside another 입니다. 다른 사람과 나란히 오다(가다) 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대신해서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심은, 제자들과 매우 가까이에서, 함께 걸으며 돌보고 위로하고 인도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처럼,
그리고 예수님과 변함없이, 제자들을 지켜 주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때로는 상실과 절망의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내거나, 병을 얻어서 고통받을 때에,
우리는 모든 것이 무너진 것 같은 상실감으로
황망해질 때가 있습니다. 또는 예상치 못한 상황 때문에, 괴로워하고 신음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정서와
문화는, 그런 일을 당하면, 주변에 알리기 보다,
홀로 삭힐 때가 많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임한
상심이 더욱 심화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우리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감정들, 즉 상심, 외로움, 고통은 자연스러운
반응들이지만, 거기까지입니다. 그저 본능적인 리액션일 뿐입니다. 그리고 삶의
일부분이고 한 영역에만 속합니다.
반면에, 사랑, 용기, 믿음 등은
또 다른 영역에 존재하며, 우리의 삶을 헤쳐 나가게 해주는 실질적인 힘이 되는 것입니다. 감정과 의지의 두 가지 다른 영역을 구분해서 다루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상실과 절망을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전에 알고 있던 작은 세계를 넘어서서, 더 큰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제는 영어예배 성도의 친척의 장례식이 있어서 다녀왔습니다. 장례식을 집례할 목회자가 없어서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고인은 두 남매의 어머니였는데, 자녀들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에게 늘 베풀고 보살피는 헌신적인
사랑의 사람이었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빈자리가 너무나 커서, 두 남매의 상실감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Mother’s Day 전날
어머니를 땅에 묻어야 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은
두 남매의 마음에 영원토록 남아있을 것이고,
그것이 씨앗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도
심겨져서, 자라고 열매 맺게 될 것이라고 위로하고 기도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추억도 이처럼 자녀들의 삶을 풍성하게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며, 살아가게 하는데, 하물며 보헤사 성령님일까 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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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alongside 옆에서 걸어가시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깊숙히 우리의 삶에 관여하는
분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17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7절)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이 보다 더 완전한 장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 속에 성령님을 보내 주셔서, 성령님과 함께 살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늘 그러셨습니다. 폭풍을 만난 제자들의 이야기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이
탄 그 배에 이미 함께 타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는 이런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상심과 절망에 빠져 있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에 빠져서, 어두움에 파묻혀 있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속에 함께 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절망에서 소망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추억이 아니라, 감정이 아니라,
실제적인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이 되고,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이 되고, 예수님의 손과 발이, 우리의 손과 발이 되어서 예수님의 사역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21절 말씀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1절)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통로가 되어서, 우리처럼, 사랑이 필요한 곳에 찾아가고 흘러가게 하실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주변에 고아처럼 버려진 사람들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서, 그들과 함께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그들과 walk
alongside 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이 육신에 되어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처럼, 예수님은 또한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동일한 사랑의 사역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위에서부터 흘러 내려, 우리에게까지 이르렀고,
우리를 통해서 이 세상 가운데 흘러 넘치게
합니다.
결국 Incarnation 성육신은, Solidarity 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되는 것이고, 부모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고아가 아닙니다. 상황이 우리를 고아로 만들어도, 관계가 우리를
고아로 만들어도, 더 이상 고아가 아닙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께서 우리의 부모처럼, 우리를 지금도 사랑하시고 구체적으로 돌봐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고 용기를 내서, 이 인생을
살아가십시다. 홀로 있어도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사랑의
통로가 되어, 우리도 서로에게 come alongside 하면서 solidarity 를 이룰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에게도 흘러 넘쳐, 위로하고 위안하고
격려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부모님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Happy Mother’s 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