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5일
성경: 마태복음 5:13-20
설교: 귀함에서 나오는 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다.
대단한 선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냥 가볍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려고 노력하라는
말이 아니고, 세상의 빛이
되려고 노력하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벌써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이라고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이 너희의 정체이니, 세상의
소금처럼 살고, 세상의 빛처럼
살라고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Don’t be something
else. 다른 것이 되지 말라.
소금이고 빛인 것을 잊지
말라. 소금의 맛을 잃고
살지 말고, 빛을 잃고
어둠 속에서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소금과 빛은 예수님 당시
가장 귀한 것들이었습니다. 로마시대에
소금은 하도 귀해서 그것을
사람들은 백금 (White Gold) 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소금이 귀하였기
때문에 때로 로마 군대에서는
군인들에게 봉급으로 돈을 주기
보다는 소금을 주었습니다. 그것을
Salarium 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이
Sal 이라고 하는 단어는 라틴말로
소금이라고 하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Salarium 이라고
하는 단어에서 봉급이라고 하는
Salary
라고 하는 단어가 파생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금이나 빛과 같이
가장 귀한 것들을 예로
들면서 바로 우리가 소금이요
빛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잘것
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세상이 존재하지
못하는 그런 귀한 존재가
바로 우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커다란 기계의
작은 나사, 언제나 바꿀
수 있는 그런 작은 나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보다 훨씬
크고 귀한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을 보니 그렇게
자기 자신을 여기지 못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은 마음
아프게 생각하셨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시며 안타까와
하셨습니다. 아무도 그들에게 그것을
얘기해주는 사람이 없었고, 아무도
그들을 그렇게 대우해주지 않았고
서로 상처를 주고 깎아내리는
모습을 보시고 그런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존귀함을 회복시켜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귀하고 가치 있는
사람들인가 하는 것을 알려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소금이요 빛이십니다.
그것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귀한 존재입니다. 얼마나 여러분이
귀하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목숨까지 내 놓으셨겠습니까? 주님께서 가치 없는
것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쓰레기처럼 버리시겠습니까? 여러분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십시오. 뭐 대단한 일을
할 필요 없습니다. 벌써 여러분들은
대단한 분들이십니다.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여러분은 그저 잃은 한 마리의
양으로 여김을 받을지 모릅니다.
99마리의 중요한 대다수가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여러분은
가장 귀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99를 버리고 나가셔서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 이곳
저곳을 헤매며 찾아다니시는 것입니다.
찾고 나서는, 여러분을 어깨에
메고 기쁨으로 집에 돌아와
온 마을에 잔치를 베푸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러분은 귀한 분들이십니다.
성경 여러 곳에 이 메시지가
숨겨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믿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이사야 43:4)
이런 깨달음, 바로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깨닫는
깨달음에서 모든 선하고 좋은
것들이 나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깨닫기
시작하면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여러분의
삶이 바뀝니다.
다윗의 변화가 그렇게 일어난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변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많이 생각하는
그런 귀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시편
139:17-18)
도대체 자기가 무엇인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시는가 하는 것이
그에게는 너무나 신선한 충격으로,
깨달음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시편
8:4, 5)
바울사도도 그것을 발견하면서 자기가
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38, 39)
이 깨달음이 그를 변화시켰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깨닫기
시작하면서 삶이 귀해지기 시작합니다.
어떤 것도 그것을 우리로부터
앗아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의로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눈에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깨달을
때 가능해집니다.
이런 의로움은 우리를 교만하게
하는 의로움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Pride를 사용하여 지키는
그런 존엄성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내가 귀한 존재라는 깨달음은
오히려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그러니 겸손함 속에서 나오는
위대함입니다. 자기의 귀함을 깨닫는
것과 겸손해지는 것은 같이
갑니다.
더이상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어떤 기준을 따라가며
자기의 중요성을 만들어가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순응하면서
자기의 귀함을 만들어가지 않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자기
자신에게 증명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필요도
없어집니다. 그런 의는 바로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서기관들이 갖고 있었던
의였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귀한 존재로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는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도덕기준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귀한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기 좋은 뭔가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귀하게 만들어진
자기의 아름다운
형상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보기에 좋더라 하셨습니다. It is good. 내가
귀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나의 기준이 달라집니다.
적당 적당히 살아가지 않습니다.
소금이 되고 빛이 된다고
하는 뜻은 Be the best you can
be. 여러분이 될 수 있는
최고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아주 충실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가
믿고 있는 그것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이 나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을 결정합니다. 내가 나 자신을
실패로 본다면 우리는 패배자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자신을 갖게 되면 우리는
승리의 삶을 살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런 자기
자신을 잃어 버렸다면, 그래서
그 아름다운 모습이 감추어져 버렸다면
어떻게 여러분이 살 수 있는
그런 full potential, 최고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태복음 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마태복음 5:14, 15)
소금이 맛을 잃고, 빛이 숨겨져 있으면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망가진 자신을
회복시키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를
다시 형성하셔서 온전한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망가진
물건은 선한 것을 할 수 없습니다.
아무 쓸데 없고 오히려
해를 가져오게 됩니다.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망가진 물건들이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범죄자였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이 마약
중독자였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이
도둑이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에 모범
시민이었습니다. 법도 잘 지켰습니다.
존경도 받았습니다. 사회의 기준을
잘 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잘못된 곳에서 그들의
의를 만들어 나갔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얼마나 귀하고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귀한
것을 깨달음에서 나온 그런
의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귀함을 모르니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도 알지
못했던 것이지요. 자기 자신을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 속에 분노가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냅니다.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믿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어두운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어두운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나온 의는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저
남에게 보이는 show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하나님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하나의 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5:20)
그런 의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을 파괴시켰습니다. 사람들을
쇠사슬로 묶어 놓았습니다.
우리 자신의 망가진 모습이
회복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서로 서로에게 많은 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망가진
모습에서 나오는 것은 그저
망가진 일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모든 것이 귀해집니다. 여러분이
귀해집니다. 다른 사람들이 귀해집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1)
소금과 빛이신 여러분 소금과
빛으로 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