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2023년 1월 8일)
마태복음 3장 13-17절
“왜 예수님은 사랑받는 자인가?”
사랑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랑이 없다면, 참으로
삭막하고 황량할 것이라고 짐작해 봅니다. 사랑은, 따뜻하고 다른 사람에게 힘을 줍니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것 때문에, 많은 것이 달라지게 됩니다. 자녀들에게
부모의 사랑은 그래서, 생존을 넘어서서, 자녀들이 성장하고 그들의 꿈을 이루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아름답고 귀중한 것 만큼, 사랑에
대한 오해와 남용도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수
많은 말과 행동들이, 진정 사랑에서 비롯되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기대나 집착인지, 그 선이 불분명할 때가 종종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귀한 만큼,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된
사람들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정의상, 남의 필요를 돌보고 채워 주는 것입니다. 나의 관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관한 것입니다. 내가 사랑의 주체가 되지만, 사랑의
대상이 더 중요합니다. 내가 아무리 사랑의 동기가 있다고 해도, 상대방이
내 사랑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나는 사랑하는데, 왜 내
사랑을 안 받아주냐고 강요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은, 그래서 헌신이나 헌금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마음을 담아서 하나님께 드리면 되는 것처럼,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내 손을 떠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사랑이 잘 받아들여졌는지, 그 결과에
집착합니다. 사랑이 전달이 되지 않은 것 같을 때에 섭섭해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보상을 원하는 나의 욕망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아름답고 귀한 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잘못된 사랑, 삐뚤어진 사랑 때문에, 관계가
어려워지는 경우도 발생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의 필요를 알고 돌보는 것인데, 그것을
발견하려면, 다른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사랑이 일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어떠한 상태에 있든, 어떤 과정에
있든, 그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을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조건 없이
말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나와 똑 같이 만들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아릅답고 귀하지만,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질문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는 예수님을 향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고 하셨을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동안, 예수님의 세례 받는 이야기 속에서 들려진 하나님의 소리에 대해서,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니,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교리적인 생각에서 결론 내리면서, 이제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셔야 하니, 이런 하나님의 선언이 시기적절하고 중요하다 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둘 다 전혀 틀린 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보게 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은, 결국,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위함인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와 같이, 연약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새로운 소망과 힘을 주시기 위하여, 세례를
친히 받으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죄사함을 받기 위한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던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15절 말씀을
보면, 세례를 받으시려는 예수님의 강한 의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15절)
예수님의 세례는, 수 많은 죄인들을 위한 그의 사랑의 행동이었습니다. 죄 없는
분이, 죄인들과 동일하게 세례 받으신 것은, 사랑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어로 solidarity
라고 합니다. 한국말로
“연대” 라고 합니다. 서로가 하나가 됨을 뜻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일 때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Compassion 과도 매우 가까운 단어입니다. Com 은 함께
라는 뜻이고, passion 은 고통받다 라는 뜻입니다. 함께 고통을
느끼는 상태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말로만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의
개념을 가르치지도 않으셨습니다. 본인이 얼마나 사랑이 많은 사람인지 과시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사랑이
필요한 자들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요단강에 던져, 그들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반면에,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세례의 의미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14절에 다음과 같이 말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4절)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수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요단강에 몸을 던지셨습니다.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 사랑의 행동을, 하나님은
보고 계셨고,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세례를 목격하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16-17절)
예수님의 이 깊은 사랑을 보고 느낄 수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알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요단강에 던지시는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은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태어나심도, solidarity 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를 지심도 solidarity 의 사랑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부활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아시니, 그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자신을 물에 던져서, 하나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우리도 우리 공동체 안에서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Solidarity 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슬픔을 겪는 자들에게 마음을 같이 하여 슬퍼하는 것이 깊은 사랑의 모습입니다. 기쁨을
누리는 자들과 함께 마음을 같이 하여 내 일처럼 기뻐하는 것이 깊은 사랑의 모습입니다. 다른 동기나
목적이 없이, 상대방의 상태에 나 자신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것이 solidarity, 깊은 사랑입니다.
만약, 고통과 슬픔을 겪고 있는 연약한 자들을 보면서, 경멸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랑의 결핍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내 자신의 연약함이 싫고 미워서,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회복되는 것 뿐입니다. Solidarity 의 사랑은 화려하지도 않고, 센세이녈
하지도 않지만, 함께 하는 상대방은 큰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 금요일 인너보이스의 묵상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라는 요한일서 3장 18절 말씀에
대한 묵상입니다.
“사랑은 말이나 혀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개념이 아니다. 사랑은 당신의 마음에서 나와 행동으로 이어진다. 오직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함으로 사랑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사람도 당신에게 말해줌으로 사랑을 가려쳐줄 수 없다. 당신 자신이 그 사랑을 경혐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 안에 나타나 당신이 진정으로 사랑의 힘을 경험하기를 바란다. 당신이 경험한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라”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서 요단강을 건넌,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사랑으로 거듭나서, 사랑의 사람들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세례는, 하나의 Prototype
이 되는 것입니다. 원형이고
모범이고 따라가야 할 표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과 딸이라” 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새롭게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 바로 다음에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예수님처럼, 광야의 시험을 받더라도 그 사랑 때문에, 극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성탄주일에, 우리는 세 명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들 또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입니다.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 사랑으로
인해서, 그들의 삶이 풍성해지길 바랍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밝고 아름답게 자라길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요단강을 함께 건넌 운명 공동체 입니다.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가지고 실천할 때에, 갈등과 오해가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만이
드러나는 이 공동체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다른 사랑을 시도하기 보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랑부터 실천하십시다. 우리는 그저 함께 하고자 했는데, 그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우리의 관계들을 회복시켜 주시고, 이 공동체를
강건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