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2022년 9월 11일)
“찾으시는 하나님”
누가복음 15장 1-10절
어떤 누구도
길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늘 안전함에 거하고,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원하는대로 다 되어지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자의든 타의든, 아무데도 소속되지 못한 채 길 잃어버린 것처럼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잃어버린 존재가 무엇인지 삶 속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여러분들 중에는 일제시대에 태어나서, 언어와 민족성을 빼앗겼던 매우 특별한 경험을 한 분들도
있습니다.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인 박탈감을 경험하였습니다. 내 나라,
내 땅에 살면서도 말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민자로서,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으면서, 늘
이방인으로 정처없이 방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꿈과 비젼을 가지고 이역 만리에 와서 살아가고 있지만,
오래 살았고, 익숙해져도, 늘 타향살이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보다도 잃어버린 존재가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압니다. 더군다나,
주류 사회의 큰 장벽 앞에서, 알게 모르게 인종차별을 느낄 때에는,
마음 한켠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적응하고
생존해야 한다고, 그리고 자녀들을 위해서 참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근할
때도 많았습니다. 이런 것이 잃어버린 존재의 모습이 아닐까요?
어떤 집단이나
사회에서든지, 이런 배척과 차별이 존재합니다. 인간이 모인 곳에서는 언제나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자신과 같은 동류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배척합니다. 차별의 기준과 잣대가 나름대로 있겠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정치적인 이유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종교적인 이유로,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정죄하고 배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실상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힘과 이익을 위한 모든 활동은 정치적인 활동인
것입니다. 1절을 보니, 그들이 어떠한 사람들이었다고 합니까?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1절)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들과 상반되며, 정반대의 스펙트럼에 있는 자들은 누구였습니까? 2절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이 세리외 죄인들이 예수님께로 나오자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2절)
이들의
생각과 태도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종교적인
파워를 가지고, 기득권을 가지고,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그들을 울타리 밖에 머물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로 그들의 status quo 를 뒤흔들고 있으니 불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명분은 하나님의 뜻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결국은
자신들의 이익과 권한을 보존하고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의
뜻은요, 하나님을 위해서 스스로를 구별하다 라는 뜻입니다. 바리새인은 원어로 pawrash
에서 나왔는데 그 뜻이 to separate 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스스로를 구별하였다는 것인데, 이젠 그 뜻이 퇴색이 되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한 핑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에게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정죄와
판단, 그리고 그로 인한 차별과 배척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시는 분이시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하나님도 당신의 잃어버린 양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 (겔 34:15-16)
잃어버린
가축도 찾으러 나서는데, 하물며 소외되고 길 잃은 영혼들을 어찌 찾아나서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절대로 차별과 배척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 증거가 되지 않습니까?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는 손가락이 없다고 하듯이, 우리 하나님은 어떤 누구도 소외되고 길 잃어버린 채로 놔두지 않으십니다.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찾으시되, 끝까지 찾아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찾아내신 후에,
그 기쁨을 함께 나누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원인으로든지 길 잃어버린 상태에 놓여 있습니까? 배척의 피해자가 될 때도 있지만, 스스로 양떼를 떠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외로움과 절망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십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반드시 찾아내시고, 어깨에 메시고, 잔치를 베푸실 것입니다. 찾으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발견된 사람들은 그들의 심정이 어떨까요?
나같은 죄인을 찾아오셔서 나를 부르시고, 나를 안아주실 때에 말입니다.
삭개오가
바로 그것을 경험하지 않았나요? 자신을 찾아오시는 예수님 때문에, 그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회개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회개가 종교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난 자들에게 일어나는 실제적인 변화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7절 말씀이 의미 심장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7절)
여기서
말하는 죄인이 누구입니까? 그 당시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정죄함 받고 배척받은 자들입니까? 1절에서 말하는, 세리외 죄인들입니까? 그래서 길 잃어버린 자들입니까? 그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왔습니다. 1절을 다시 보십시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이것이
회개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들이 아니라, 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죄인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누가복음
18장에는 스스로는 의롭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
바리새인이 나오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눅 18:11-14)
진정으로
회개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자기의로 가득찬 바리새인 아닙니까?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의롭다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여기서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죄인입니다. 도토리 키 재기 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선언했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0-12)
만약, 어떤 모양으로든지, 어떤 이유로든지, 우리가 교회나 사회에서든지,
차별하고 배척하고 길 잃은 영혼들을 만들어 버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하는
행위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내가 바리새인이 될 수도 있고, 내가 세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정의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정죄와 판단은 우리의 권한 밖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영접하고 받으셨는데, 그리고 하나님이 직접 찾아서 어깨에 매고 오셨는데, 누가 누구를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배척이 아니라, 회개하여,
서로를 용납하고 수용하고 존중하는 일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깨달음과 태도로 공동체
생활을 할 때에, 이 공동체 안에는 늘 기쁨이 넘치고, 치유가 일어나고,
서로를 돌보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성 차별, 나이 차별, 지식 차별, 문화 차별, 도덕 차별 등으로 다른 사람들과 차별한다면, 내가 높아지고 우월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 감정과 기분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것
뿐입니다. 나도 망가지고, 다른 사람들도 망가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누구나 할 것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죄인임을 깨달을 때에, 그래서 회개하고 변화될
때에, 우리가 속한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임하시고,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그런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슬픈 자와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적인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영혼을 살피는 영적인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늘이 기뻐하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인간적인 것은 모두 사라지고 하나님만이 높임을 받는 그런 교회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담대히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