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4일
성경:예레미야
18:1-11
설교:
변할 수 있다
형성이
되고 빚어진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고,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지금 이 모습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계속해서 형성이 되고 빚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우리가 어떻게 지금 이 자리에 왔는지 잘 의식도 하지 못합니다. 깊은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살았기 때문에 그저 이
모습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대로 이 모습이 되게끔 내버려 둔 것이지요. 의식을 하며 형성의 과정에 참여하지 못했었습니다. 살다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고, 이 모습을 갖게 된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모습이 있습니다. 제가 손주가 5이 있는데, 5이 다 다릅니다. 다 다르게 태어났습니다. 유전적으로 벌써
어떤 모습으로 형성이 되어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많은 질병을 보면 유전적인 것이 많습니다. 어떤 특정한 성격을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성경에
나오는 야곱을 보면 그것을 잘 볼 수 있습니다. 그는 fighter로 태어 났습니다.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창세기 25:26)
그는
자기의 형보다 먼저 나오기를 원했습니다. 이런 그의 성격이 그에게 많은 문제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런 성격 때문에 자기 형을 속여 장자권을 탈취하려고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아버지 마저 속여 그 장자권을 탈취하려다가 결국은 집에서 도망쳐 나와야 하는 그런 운명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를 형성하는 것은 그저 유전적인 어떤 코드에 의해서 결정이 되지는 않습니다. 즉, 유전적으로 미리 결정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는데 동감이 가는 말입니다.
“Various
options are penciled in by our genes, and our life experiences determine which
get inked.”
“유전적으로 연필로 그려져 있는 것이 있지만 우리의 삶의 경험이 연필로 그려져 있는
것에 잉크로 확인을 하는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환경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형성되는 모습이 달라집니다.
야곱에게서
그것을 잘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태어나기도 했지만 그의 환경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에게 아무것도 쉽게 오지 않았습니다.
에서에게는 장자로써 모든 것이 쉽게 왔지만 야곱은 싸워서 쟁취해야만 했습니다. 자기의 아내도 쟁취해야만 했고, 자기의 부도 쟁취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을 더욱더 fighter로 만든 것입니다. 심지어 교활하고 속이는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는 잘 싸웠습니다. 싸우면 이길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갖고 태어난 것이 있습니다. 이 모습을 갖고 태어난 것입니다. 좋던 싫던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지요. 부모를
원망해야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 과정을 통해 빚어졌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어떤 모습을 지금 갖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벌써
우리의 과거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형성이 되어버렸는데 어떻게 합니까? 엎지러진
물이지요.
그러나
좋은 소식은 우리는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크리스챤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변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태어난 것에, 또한 우리가 형성된 모습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하신 말씀을 믿습니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3)
이
말씀을 제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에 맞게 말한다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변할 수 있다.
여러분은
변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나이에 상관이 없이, 여러분의 능력에 상관이 없이, 여러분의 환경에 상관이 없이, 여러분은 변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에 대해 부족한 것이 느껴진다면 바꿀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크리스챤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그곳에 묶여있지 마십시다.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다.
오래된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항상
진실케 내 맘 바꾸사
하나님
닮게 하여주소서
항상
진실케 내 맘 바꾸사
하나님
닮게 하여주소서
주는
토기장이 나는 진흙
날
빚으소서 기도 하오니
항상
진실케 내 맘 바꾸사
하나님
닮게 하여주소서.
우리의
마음이 바뀌는데에서 모든 것이 시작합니다. 우리의 환경이 우리를 형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환경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이 우리를
형성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환경에 반응하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바뀌면 우리가 우리의
환경에 반응하는 것도 바뀝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자유라고 하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는 변할 수 있는 힘입니다. 우리의 무기력함을
극복할 수 있는 힘입니다. 우리가 있는 이곳을 넘어서서 나갈 수 있는 힘입니다.
맞습니다.
유전적인 힘은 강합니다. 맞습니다. 우리의 환경의 힘은 강합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 힘이 더 강하다고 믿습니다. 우리 자신감의
힘이 더 강하다고 믿습니다.
야곱은
fighter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환경이 그를 더욱더 fighter로 만들었습니다. 끝에 그는 하나님과도
싸워 이기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씨름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습니다. 그 싸우는 과정 속에서 그가 변하였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됩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뜻은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신다, 하나님이 이기신다, 이런 뜻을 갖고 있습니다. God prevails.
우리는
우리의 환경 때문에 무기력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모습 때문에 좌절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환경과 우리의 유전적인 요소를 디디고
이겨나갈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그 힘이 바로 자유함입니다.
하나님께서
토기장이 이시고 우리가 진흙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시는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갈등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일하시며 우리를 형성하시고 빚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꾸 우리의 무기력함으로 돌아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힘을 믿는 것과 하나님의 힘을 믿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상태가 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힘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쉽게 절망으로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힘을 믿을 때, 여러분은 소망으로 인도될 것입니다. 그 둘은 아주
다릅니다. 형성이 되는 모습이 아주 다르게 나타납니다. 여러분 자신의 능력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많는 프레셔를 받을 것입니다. 너무 많은 짐을 안게될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자기 자신에 매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그 pressure에서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그 짐으로부터
자유케 될 것입니다.
제대로
형성이 되고 빚어질 수 있는 좋은 환경, 긍정적인 것으로 빚어질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질 것입니다. 괴테가 우리는 사랑으로 빚어진다고 말했는데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사랑과 소망으로 빚어지는 것과 두려움과 절망으로 빚어지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3년동안 배웠던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그저 기적에서 그것을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진리의 힘을 보았습니다. 끝에 그들은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생각, 그들이 세상을 보는 눈,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빚어준 것입니다.
이사야도
바로 이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이사야 40:28-31)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그저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후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의
삶에 대해, 무언가를 하기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함을 사용하여 그저 제자리에 앉아 자기 동정이나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새롭게 빚어지게 자기 자신을 내놓는 것입니다. 회개는 이제 더이상 우리의 환경에 무기력하게 빚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빚어지기를
결단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기 자신의 능력을 믿는 것으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회개는 토기장이의 손에 우리 자신을 맡겨
새롭게 빚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진흙에 불과합니다. 아마 깨진 그릇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주어진다면 여러분은 아름다운 그릇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사도가 가졌던 이미지 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