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21일
성경: 누가복음 13:10-17
설교: 구부러짐과 곧음
오늘 우리는 구부러진 여인을
봅니다.
그 여인은 똑바로 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18년을 살았습니다. 쉬운 삶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삶은 말 그대로
구부러져 있었습니다. 언제나 사람들을
볼 때,
옆으로,
곁눈질을 하며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대로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늘 삐뚤게
봐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이
세상을 보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녀의 몸이 육체적으로 구부려져
있었을 뿐 아니라, 그의 존재가
꾸겨져 있었습니다. 말라 비틀어져
버린 모습, 그것이 바로
그 여인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설교를 시작한 후에
그 사람은 회당에 들어왔습니다. 한국어 성경을
보면 그 여인이 그저
거기에 앉아 있었다고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영어 성경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Now
he was teaching in one of the synagogues on the sabbath. And just then there
appeared a woman with a spirit that had crippled her for eighteen years.” (누가복음
13:10-11)
이 여인은 늦게 들어왔습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처럼 떳떳하게 앉아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예배에 들어간
후에 몰래 숨어 들어왔을지도
모릅니다. 이 여인은 자기가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고
하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자기가
감히 거기에 있지 못할
곳이지만 낫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곳에 나타난 것입니다. 마치
몰래 예수님의 옷을 만진
혈루병을 앓고 있던 여인처럼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당연히
여기는 것을 그 여인은
당연히 여길 수 없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 마저도 말입니다.
이 병이 그 여인의 삶을
짓눌렀습니다. 자신감을 앗아갔고, 상실감을 주었고, 한 인간의
존엄성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는 수치감과
창피함을 매일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아니, 이 병이
그렇게 했던 것이 아니라, 그녀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 여인이 속한 사회가
그렇게 했습니다.
그녀에게 다른 좋은 면들이, 아름다운
면들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에는 그 사람은 그저
구부러진 여인에 불과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정체성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그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정체성을 구부러진 여인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 그는 귀한
하나님의 자녀였고, 아브라함의 딸이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누가복음 13:16)
얼마나 종종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을 이런 눈으로 보십니까? 우리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그저
우리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그것이 육체적인
모습이던, 성격이던, 어떤 특성이던,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그 사람을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사람들은 매우 편파적이고
판단적일 수 있습니다.
세상을 그렇게 보고 사람들을
그렇게 보도록 우리의 마음이
쇠뇌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렇게 condition되어 있다는 것을 봅니다. 그 여인이
세상을 옆으로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사람들은 세상을
자기가 알고 있는 그 방법으로
밖에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알고 있는 그 유일한
방법이 구부러져 있다는 것 조차
깨닫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자기가
알고 있는 그 방법대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회당장의
모습입니다. 그 여인이 고침을 받은
것에 대해 그는 기뻐하지
못했습니다. 18년 동안이나 그 병에
시달린 그 여인이 고침을
받은 것을 보고 그는
탐탁치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가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그 이유는
그 일이 안식일에 일어났다는 그것
뿐이었습니다. 얼마나 구부러지고 좁은 생각인가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누가복음 13:14)
그는 세상을 한 면으로만
보도록 컨디션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자기의 삶을 한 면으로만
보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는 안식일도
자기가 알고 있는 그 한가지
방법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말라. 그래서 그가 화가 났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한가지 방법으로만
보는 것을 고집한 그가
자기의 그 방법이 구부러져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판단하고 정죄하였던 것입니다.
안식일의 목적은 우리를 묶어놓고
있는 것으로부터 풀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베푸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누가복음 13:16)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후에 한 날을 특별한
날로 정하셨습니다. 그 날을
따로 세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거룩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창세기 2:2, 3)
우리를 거룩하케 하신 것은
우리가 좋은 삶을 살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좋은 삶을 살 자격이
있습니다. 꼭 여러분들이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것은 비참한
삶을 살게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좋은 삶을 살 수 있게
말입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일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안식일에 고치신 것입니다. 그 여인이
좋은 삶을 살 수 있게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안식일의 정신이었습니다. 그런데
회당장은 너무 자기의 한 생각에
빠져 버려서 진정한 안식일의
정신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의 생각은
구부러져 있었고 꼬여 있었습니다.
이 여인이 육체적으로 구부러져 있었지만
그 여인에게는 곧아지고자 하는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장애물을 물리치고
회당에 온 것입니다. 고침을 받기
위해 말입니다. 나아만처럼 내가
당연히 고침을 받기에 합당하다는
생각을 갖고 온 것이
아니라,
구부러진 몸을 가지고, 쪼그라진 모습을
가지고 깨진 심령으로 온 것입니다. 구부러진
몸,
구부러진 심령, 그것을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그 갈망이
그에게 고침을 가져온 것입니다.
저의
8월
18일 Inner Voice 입니다.
“정직한 영을 당신에게 주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정직한 영이라고 하는 것은 곧 곧은 영을 말한다. 삐뚤어지지 않고 곧은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곧은 영을 줄 때에, 당신의 삶이 곧게 된다. 삐뚤어진 길로 몰고가는 삐뚤어진 영을 하나님께서 고쳐주신다.
하나님께 곧은 영을 달라고 간구하라.
삶의 모든 것이 곧게 펴질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곧은 영을
주셨습니다.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의 삶을
반듯하게 해주셨습니다.
그 여인은 구부러진 몸을 갖고
있었지만 진정으로 구부러진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바로 회당장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구부러진 몸을 갖고 있었지만
회당장은 구부러진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고침을 받기 원하는
갈망을 잃는 순간, 우리의 영은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구부러져 있다고 하는 것 조차도
알지 못합니다.
깨진 심령, 겸손히 고침을
받기 원하는 갈망 - 이것이 우리의 존재를 펴줄
것입니다. 더이상 꾸겨지고 말라 비틀어진
삶을 살 필요가 없습니다. 똑바로
설 수 있습니다. 당당하게 설 수 있습니다. 새로운
자신감이 여러분을 채울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과 방법을 고집하는
그런 눈에 먼 자신감이
아니라…
자기가 만들어낸 자신감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구부러지게 만드는 그런
자신감이 아니라…
깨진 존재 가운데 임하는
자신감,
하나님에 대한 자신감,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우리를 채울 것입니다. 이런
자신감은 인생의 성공에서 나오기
보다는 오히려 인생의 실패를
경험할 때,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자신감이 바로 바울이 갖고
있었던 자신감이었습니다.
내가 약할 때, 내가 강함이니라. 나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 세상의
어느 것도 나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자신감입니다. 결국, 이런 자신감이
있을 때, 어떤 환경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펴질 것입니다. 곧아질 것입니다.
가끔 고통을 당하고 나온
사람들이 고통에서는 벗어났지만 그 고통의 결과로 왜곡된
생각을 갖게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을
보는 눈, 세상을 보는
눈이 삐뚤어질 때가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의 힘으로 고통을 이겨내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받을 때, 그렇게 되지
마십시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십시다.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경험하십시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다. 고통의 시간에서 나올 때, 우리는
반듯하게 나올 것입니다. 구겨진 우리의
존재가 반듯하게 펴질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사야가 본 비젼이었습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사야
40:4, 5)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위해, 또한 이 세상을
위해 그것을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