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31일
성경: 누가복음 12장
13-21절
설교: “하나님께 부요한 자”
오늘 본문은
영어성경을 보니 다음과 같은 제목이 달려 있습니다. “The Parable of the Rich Fool”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라고요.
오늘 본문
20절에서 예수님은 이 부자를 “어리석은 자여” 라고 부르셨기에 그와 같은 제목이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어리석은 자여” (20절)
그런데
질문하게 됩니다. 이 부자는 어리석기보다 현명한 사람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에게 밭이 있는데 소출이 풍성했으며, 그래서 곡식을 쌓아 둘 곳이 부족해서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서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에 쌓아 두고자 했습니다. 이 부자는 현명하게 미래를 잘 준비하면서,
자신의 비지니스를 책임감있게 잘 건사하고 있으니 오히려 칭찬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저희 집
큰 애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닌 지 2년 정도 되었는데 OSAP 갚아 나가면서
재데크를 위해서 나름대로 열심히 생활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가 스무다섯살 때에 뭘 했나 할 정도로 요즘
젊은 세대들은 재정에 대해서 더욱 적극적인 것을 보게 됩니다.
일전에
영어예배 어떤 모임에 참석하면서 알게 된 것이 있는데, 한 남자 교우는 내년이면 55세가 되는데, retire 를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들 궁금해서 질문하는 것이, 그동안 얼마나 모아 두었냐고 하니, 수십 만불이라고 하는데 그만한 돈이 많은건지 적은 건지 모르지만 다들 부러워하는 눈치였습니다. 광고에서 말하는 슬로건이 Freedom 55 인데, 그는
곧 그렇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부자도 이와 같은 것 아닙니까? 미래를 잘 준비하고 있으니 칭찬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도, 왜 예수님은 그를 보고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을까요? 15절 말씀을 보니, 예수님이 왜 이 부자를 보고 어리석은 자라고 했는지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15절)
돈이 많고
재물이 많은 것 자체를 가지고 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하면서,
아침 일찍 부터 밤 늦게까지 수고한 결과는 반드시 그 사람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justice 의 이슈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라고 합니까? 탐심입니다. Greedy 해 지는
것이 문제 라는 것입니다. 탐심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탐심은 나 자신 밖에 모르기 때문에 우리의 눈을 멀게 합니다. 물질에 대한 탐심,
권력에 대한 탐심, 명예에 대한 탐심 등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합니다.
주변에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거기에 연관된 사람들의 상황은 어떤지 모르게
됩니다. 이것이 탐심이 가져다 주는
폐단입니다.
오늘 본문
17절로 19절을 보면, 이 부자가
자기 자신에 푹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17-19절)
여기서
이 부자가 자기 자신에 푹 빠져 있는 것을 명확하게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내가, 내 곳간, 내 모든 곡식과 물건,
내가 내 영혼에게, 등 모든 것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곡식과 물건들 때문에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하며 사는 것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일까요?
예수님은
이미 1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15절)
생명이라고
함은 인생이고, 삶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탐심, 즉 자기 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은, 가장 불쌍한 삶이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변과 단절되고,
홀로 외로이 살아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차알스 디킨즈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에
나오는 주인공 스쿠르지가 딱 그런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그러한 삶에서 풀려나서, 더 큰 세상을, 둘러 볼 수
있는 삶의 여유와 자유함이 있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 부자는, 밭에 소출이 많았는데, 그 모든 곡식을 거두고, 탈곡하고
곳간에 쌓아 두는 일을 혼자 했을까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에게는
수 많은 일꾼들이 그의 수하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고, 그저 자기에게만 빠져 있지 않습니까? 그들에게 콩고물이라도
주었을까요? 빵 부스러기라도 주었을까요?
탐심은, 이처럼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못하게 합니다. 내가 독불장군도 아니고, 모든 것이 누군가의 수고와 희생과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맙니다. 그것은
그의 영혼이 병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수요예배에서도
유사한 내용을 묵상했었습니다.
아브람이
조카 롯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창 13:9)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에, 당장의 이익을 위해서 그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고, 선택권을 롯에서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어떤
축복을 아브람에게 주셨습니까? 롯은 동쪽 한 귀퉁이를 차지 했다면, 아브람은 동서남북, 그리고 종과 횡으로 다니는 모든 땅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아브람 만큼 부자인 한 청년의 이야기기 나오는데 그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말하길,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시자, 그가 재물이 많아서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탐심이 그의 발 목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 22-23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눅 18:22-23)
탐심의
노예가 되었을 때에, 우리는 불행하게도 하나님을 져버리게 되고, 우리의 이웃마저도 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탐심은 우상숭배이고, 자기 자신을 숭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하는 것이 당상이 아닙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행복인 줄 알고 그것을
위해서 재물을 거둬 들이고, 재물을 사용하지만, 거기에는 끝이 없습니다.
평안은 그렇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히려,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며, 주신 것들 가운데, 얼마만큼을
늘 어려운 자들을 위해서 나눌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임하는 것입니다.
Security
즉 안전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힘으로 내 손으로 세우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손이 우리 인생을 붙잡아 주실 때에 안전한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시 127:1-2)
예수님은
이것을 깨우쳐 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 있는 누가복음은 특히나, 가난한 자와 연약한 자에 대해서 큰 관심과 비젼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이사야서 말씀이 본인에게 임하셨음을 알리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18-19)
어떤 모습이든지
거기서부터 자유케 되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의 본질이었습니다.
우리 이민자들에게는, 돈의 문제, 물질의 문제가 민감하다고 생각합니다. 자녀들을
위해서 이민왔다고 할 때에, 더욱 그럴 것입니다. 자녀들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본인들보다 더 나은 미래를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힘든 일과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경제적인 안정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우선 순위였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는 더욱 더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돌아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생존과
번영이라는 명목 때문에, 탐심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돌아 봐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망각하고, 내 이웃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생각해 봐야 합니다.
물질에
대해서는 우선 순위가 제대로 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늘 끌려 다닐 것입니다.
아브람 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굳건히 믿고, 먼저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기만을 원하는 삶은, 잠자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의 부자처럼,
언제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데리고 갈 지 모르는체 잠자고 있는 삶인 것입니다. 거기서
깨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대해서 얼마나 부요한 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
부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탐심을 버리고,
주변을 바라보며, 내게 주신 것들 가운데 나누려고 하는 그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에, 우리가 오히려 부요하게 되고 넉넉하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어떤 권사님은, 코빗 기간동안 잘 보이지 않는 교우를 찾아가면서 생필품 등을 사가지고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물질이 많아도 탐심의 노예되지 않은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물질에
대한 의식적인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 부요한 자들의 삶이며, 아브람에게 주셨던 놀라운 축복이 자자손손에게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작년 이맘
때에, 우리 교회는 무궁화 양로원 기금 마련을 위해서 총 $109,222 불을
모아서 전달했습니다. 영어예배에서 더 많이 거두었다 라는 것이 고무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일로 더 풍요로와지지 않았습니까?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물질을 나눌 때에, 우리 안에 기쁨과 감사가 넘쳐났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제자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교우 여러분,
베풀고, 어려움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일을 힘쓸 때에, 자녀손들도 보고 따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신앙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고,
삶을 지혜롭게 사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에게 부모들의 신앙이 죽은 신앙, 말로만 신앙, 잠자는 신앙이 아닌 것을 깨닫게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영적으로 깨어서, 물질에 대한 탐심과 집착을 내려 놓고, 하나님께 부요한 자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인생을 오히려 부요하게 만들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