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15일
성경: 사도행전 11:1-18
설교: 확인이 아닌
변화를 가져오는 기도
오늘의 이야기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또한 매우
이상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 뒤에 숨어 있는
이슈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도대체 이 짐승들은 무엇이며
또 그것들을 먹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왜 베드로는 그 짐승들을 먹기를
거부하였는가?
많은 질문이 올라옵니다. 2000년 전으로
돌아가 그 당시의 관습을
알고 그 사람들 속에
함께 살기 전에는 이 이야기를
깊이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베드로는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도를
하는 가운데 이런 경험을
하였던 것입니다.
“내가 욥바 시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어 내 앞에까지 드리워지거늘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사도행전 11:5-6)
이것을 베드로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꿈이었습니까? 베드로가 기도하는
가운데 잠들었고 꿈을 꾸었던
것인가?
아니면 황홀한 비젼이 그에게
임했던 것인가? 정확히 우리가 그것을
알 수는 없지만 그는 이런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황홀한 비젼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음성을 들었고 그 음성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사도행전 11:7)
베드로는 완강히 거부합니다.
“내가 이르되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사도행전 11:8)
이것이 베드로에게는 아주 불편한
경험이었습니다. 평생 그런 음식을 먹는
것은 깨끗지 못하다고 배워왔고,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 왔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가
본 그 음식들은 먹어서는 안되는 부정한
음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음성이 그것을 먹으라
합니다.
베드로에게 그 음성은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때문에 그것이
어려웠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이 되는 그 음성이
이제까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정 반대의 것을 베드로에게 지시했던
것입니다.
그 음성은 베드로에게 먹으라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사도행전 11:9)
이것이 세번 일어났습니다. 그러니 확실히
일어났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잘못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확하게 베드로에게
온 메시지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한가지
기도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것은 기도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벌써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확인해 주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원하는대로
움직이시는 분이 하나님이 아닙니다.
기도를 하다보면 그것이 기도의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기도를 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기도에 대해
오해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면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고, 자기가
벌써 알고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착각합니다.
자기의 생각을 절대화시키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자기가 벌써
갖고 있고, 믿고 있고, 붙잡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를 하면서
내가 아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세계로 끌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옛 사람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기도를 제대로
하면 그렇게 옛 사람으로 남아있지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가 기도할
때,
그에게 일어났던 것이었습니다. 그가 이전에
갖고 있던 생각과 편견이
도전되었습니다. 자기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무엇이 깨끗하고
무엇이 깨끗지 않는가 하는
것에 대해 자기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도전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태도를 바꾸어야
했고,
자기의 관점, 심지어 믿음까지
바꾸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기도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보다
훨씬 더 크신 하나님을
기도에서 만났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단순히 내가 벌써
알고 있고 벌써 믿고
있는 것에 대한 확인이라면
그 기도는 위험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그래도 자기의 개인적인
의견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기도하면서
완전히 하나님이 도장을 찍어준
완전한 진리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개인적인 견해가 하나님의 뜻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확인되는
그런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원했던
것을 예수님은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정확히 자기가 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의 차이를
기도를 통해 아셨습니다. 자기의 개인적인
희망 사항과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원하시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깊은 영성에 도달한
분의 모습입니다.
바울의 기도도 그와 같았습니다. 한번
바울은 자기 몸에 있는
가시를 위해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 가시가
정확히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그 가시가 바울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그의 사역에도
지장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세번 기도합니다. 여기서도 세번… 즉, 기도할
만큼 하였다는 말입니다. 그 가시를
뽑아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가시를 빼어주시지 않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기도를 통하여 얻지
못했습니다. 바울사도도 자기가 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영적인
성숙함입니다.
바울이 원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신, 그에게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고린도후서
12:9)
영적인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은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맞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는
것,
내가 생각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맞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항상
자기가 맞아야 하고, 자기가 의로와야
하고,
남에게 책잡히지 않고 사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며 살기도
합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람들은 많은
희생도 감수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영성은 자기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종종
우리 속에 있는 우리의
편견을 보게 합니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를 만나기
전에 바울은 율법의 의로써는
흠이 없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고 나서 그는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라고 말하면서
선한 것을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의 무능력함을
인정하였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우리가 얼마나 작은 생각, 좁은
생각을 갖고 살았는가를 보게
됩니다.
영적으로 깊어져 가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감추어지지 않은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이유는 우리를
비난하고, 판단하고,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넓혀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비젼을 넓혀주시고, 더 큰 진리를
볼 수 있게 하시기 위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성장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비젼보다 훨씬
더 큰 비젼을 갖고 계십니다.
이런 면에서 영적으로 깊어진다고
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가기 원치 않는
곳으로 우리를 이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삶을 도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누구인가를 보게
만들고 그리고 거기를 넘어서서
더 큰 사람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질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더 큰 자기
자신의 모습을 끌어 안으라고
도전합니다. 우리 속에 늘 있었던
자신의 모습이지요. 그런데 두려움
때문에 숨겨놓고 있었던 존재입니다. 성령께서
그 사람,
바로 더 큰 사람이
되라고 용기를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오기는 하지만 홀로 있지는
않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감싸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받지 못했지만, 그래서 가시의
아픔을 안고 살아야 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으로 그는
충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충분했습니다. 그가 그의
연약함을 끌어안을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연약함 속에
하나님의 강함이 온전해진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변화시켜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새로운 movement를 시작하려고
하셨습니다. 이방인에게 문을 열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편협적인 생각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비젼을 펼쳐나가실
수 없었습니다.
이방인이 더럽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한 그는 이방인에게 자유롭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고넬료에게 보내기 전에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먼저 변화시키셔야
했습니다. 그의 편견을 먼저 도전하셔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사도행전 11:9)
두주 전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베드로의 소명을 회복시키셨는가를
묵상하였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을 세번 하시면서 그의
소명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지금은 베드로의
생각을 바꾸셔야 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음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기와 다른
사람들에게 대한 베드로의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섞이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예수님 당신에 로마 군인이
있었습니다. 자기의 종이 아팠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그를 고쳐달라고 합니다.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오기를 꺼려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마태복음
8:8)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와 초대 기독교인들이
자기들의 편견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받아들이기에
아주 거북한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자기가 잘 알고
있고 아주 familiar
한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는 이방인에게
전도할 수 있는 문을
열 수 있었습니다. 이 편견이 제거되니 성령께서는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었습니다. 성령은
초대 기독교인들을 사용하여 이방인들에게
아무런 제약도 없이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바울사도는 벌써 이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이실 것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자기는 이방인의 사도라고까지 하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바울은 자기 동족으로부터
배척을 받았고 미움을 받았습니다. 이방인에
대한 바울의 태도를 그들은
싫어했습니다. 바울은 베드로보다 더 먼저
그리고 더 많이 이방인들에게
문을 열었습니다. 할례를 할 필요가
없다,
음식의 규정을 지킬 필요가
없다,
이방인과 유대인에게는 차이가 없다
라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할례를 할 필요가 없다
라고 하는 말은 대단한
변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라디아서 3:28)
이 비젼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이런 비젼을 가진
것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비젼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자기들의
편견과 좁은 마음을 뛰어넘을
수 있는 메시지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Visionary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의 힘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작은 세계를 확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를 우리에게 열어줍니다. 기도의
사람들이 되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