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2022년 5월 8일)
요한계시록 7장 9-17절
“눈물을 씻어 주시는 하나님”
Victor Frankl 이라는 홀로커스트 생존자는 그의 책 Man’s Search for Meaning 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He who has a WHY to live for can bear with almost any How. 왜 살아야 하는 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모든 상황을 견딜 수 있습니다. 라고요.
Victor 가 포로 수용소에서 지낼 때에, 생존할 수 있었던 기적같은 일을 경험하였는데, 그 이유는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왜 살아야 하는지를 포기했던 주변의 사람들은, 음식이나 약이 부족해서 죽기보다 소망이 없어서 죽는 것을 목격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흰 옷 입은 자들”이라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들에 대해서 여러가지 의견들이 있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신앙으로 살았던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9절에, “흰 옷을 입고”, 13절에,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절에,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이 흰 옷 입은 자들도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의 삶에서 경험되어지는 환난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신앙이 한 사람의 가치관을 결정하고, 그 사람의 가치관이 삶의 목적을 즉 왜 살아야 하는지를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신념이나 신조가, 그 사람의 가치관을 결정할 것이고 삶의 목적을 결정할 것이고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결정하게 할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믿고 있느냐에 따라서, 삶의 모습이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신앙이 있다면, 그 사람의 삶은 분명하고 특정한 삶의 목적을 가지게 되며, 분명하고 특정한 삶의 태도를 가지고 그 목적을 이루려고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흰 옷 입은 사람들은 그들에게 있는 신앙으로 인해서, 삶의 목적이 분명했고, 그래서 삶을 살아가는 모습과 태도도 분명했습니다. 그들이 10절을 보니, 큰 소리로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0절)
그런데 이런 외침은, 이들이 죽은 후에만 외치는 찬양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평소의 삶에서도 이 외침으로 살았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외침은 그들의 신앙이 어떠한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척도가 됩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도다” 라는 말은, 로마황제가 황제가 아니라,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이 진정한 황제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에 동조하지 않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힘과 권력을 가지고 하나님처럼 행세하는 세상의 가치에 오히려 대항하고 있는 보게 됩니다. 광야에 외치는 소리와도 같습니다.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채,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살아가고자 힘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의 내용처럼,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이루기를 힘썼을 것입니다. 세상은, 미움이 있는 곳에 무관심을, 상처가 있는 곳에 폭력을, 그리고 분열이 있는 곳에 배척을 할 지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갈 때에, 그들이 환난을 당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 아닙니까?
사도 요한은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요한일서 3:13)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도, 이 세상의 가치와 힘이, 그를 거절하고 배척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오늘 본문 14절을 보면,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당한 환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4절)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라고 하는데, 이 말은 그들이 신앙으로 큰 환난을 통과했다 라는 말입니다. 포기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견뎌냈고, 예수님처럼 자신의 십자가를 지었다 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종국은 어떻게 된다고 사도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까?
15절 이하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15-17절)
할렐루야!
16절을 보면, 그들이 경험한 환난의 내용이 가히 짐작이 갑니다. ��주렸고 목말랐고, 해나 뜨거운 기운에 상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면서 받은 환난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절 이하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C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 11: 23, 27)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 때문에 경험할 수 밖에 없었던 환난들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대해서 타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환난을 피하기 보다, 환난을 끌어 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신앙이 있으면서도, 이 세상 살 동안에 아무런 갈등과 환난과 핍박이 없다면, 그 신앙이 무엇인지 반드시 질문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다른 그 어떤 것도 겸하여 섬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마치 밭에 감춰진 보물과 같다고 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밭에서 그 보물을 발견하고 집에 돌아가서 있는 소유물을 다 팔아 그 밭을 사서 보물을 소유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였으니, 환난은 더 이상 환난이 아닌 것이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큰 것을 보았으니, 환난은 너무나 작게 보여질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을 지키고 어린 양의 뒤를 따라간 사람들은, 그러기에, 어린 양이 그들을 생명수 샘으로 인도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환난을 당한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어제 합동 당회로 모였을 때에, 어떤 장로님이 그러십니다. 우리 교회에 처음 왔을 때에 보니, 나이 많은 분이나 젊은 사람들이나,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섬기며 돌보는 모습이 너무나 신선했다고 합니다. 권위의식이 없이 말입니다. 그들에게 있는 자유함과 교회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교회가 모든 사람들에게 고향 같은 곳이 되고, 특히 젊은 사람들이 언제나 다시 찾아올 수 있는 집이 되는 것 같아서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진실한 신앙에서 비롯되는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고 돌볼 때에,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그런 교회로 더욱 세워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영적인 것은, 이처럼 언어, 문화, 나이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위해서 수고하고 희생한 것의 끝은 무엇입니까? 어떤 결과를 기대하십니까? 자녀들이 단지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자녀들도 부모처럼, 하나님을 믿는 신앙 때문에, 삶의 목적이 달라지고, 삶의 태도가 달라지게 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 때문에, 신앙 때문에, 그들도 세상이 주장하는 가치에 동조되지 않고, 어린 양의 길을 따라가는 것을 바라고 기도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신 말씀처럼, 우리의 자녀들도 그렇게 환난을 담대하게 이겨나가기를 기도할 것입니다.
며칠 전에, 이웃 백인 할머니 한 분이 교회 주차장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본당 입구 지붕 창문에 걸려 있는 하얀색 십자가를 보더니, 그 앞에 서서 성호를 긋고, 목례를 하며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혹시 우크라이나 사람이어서 전쟁이 끝나기를 위하여 기도했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니면,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했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에, 우리들의 어머니를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가장 vulnerable 모습으로 자신을 내어 주셨지만, 실상은 가장 강한 어머니가 연상이 됩니다. 자녀들을 위해서 아낌없이 희생하지만, 어린 양처럼, 죽음과 부활의 십자가를 날마다 살아내시는 어머니가 연상이 됩니다. 자녀들을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면서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게 하시는 어머니를 보게 됩니다.
또한 보좌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들의 아버지를 연상하게 합니다. 겉으로는 엄하시지만, 돌아온 탕자의 아버지처럼, 새 옷을 입히시고, 눈물을 닦아주시고, 기쁨의 잔치를 베풀어주시니 말입니다. 우리가 죽어도, 우리의 자녀들을 다시 볼 수 있는 길은, 그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여, 어린 양의 길을 따라 살아가는 것 밖에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이 더욱 더 정금같이 되어서, 자녀손들에게도 이어지는 복된 가정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남길 수 있는 유산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신앙 뿐입니다. 그것이면 됩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 신앙안에 삶과 죽음은 다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 신앙이 우리를 영원으로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수고와 희생이 반드시 끝이 있고, 아름다운 열매가 맺어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렇게 이루실 줄로 믿습니다.
Happy Mother’s Day!